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름 Jan 15. 2017

우리가 헤어진 이유

내가 어른이 되질 못했기에




한국에 돌아와 나는 그와 연락을 할 수단이 핸드폰 밖에 없다는 것에 분노했다.
나는 한국에 도착해서 날 보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눈물을 보며, 그와 이별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고 그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여 바로 언니의 핸드폰을 빌려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내가 떠난 후에도 나리타에 있다가 돌아가는 갈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내가 돌아가겠다는 4월이 올 때까지 변함없이 쭉 연락했다.






그리고 내가 4월에 가기로 했던 나가노현의 호텔
출국을 몇 일 앞둔 시점. 갑자기 여진으로 나가노현에서 또 큰 지진이 났다.
아빠는 절대로 보낼 수 없다며, 날 소개 시켜준 인턴쉽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나의 결정은 산산 조각이 났다.






부모님의 반대로 나는 짧은 3개월의 기간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끝냈다.
한국으로 갑작스럽게 돌아온 나는 틀어져버린 계획으로 인해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전전긍긍했다.



가난하고 우울했던 나의 삶의 유일한 구원이었던 워킹홀리데이.

그 희망을 잃은 나는 또다시 어둠의 나락에 놓여져있었다.
변하리라, 그 절망에서 벗어나리라 무던히 애썼던 시간들은 사라졌고 그 상실감은 다시 나를 원점도 아닌, 그보다 더한 바닥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다시 우울해져갔다.

매일 밤을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떠밀리듯 취업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첫 면접을 본 작은 광고 회사. 합격 소식을 듣고 집으로 걸어오며 옳은 선택이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날 괴롭혔다. 부모님은 기뻐했으나, 점점 더 우울감과 허탈함이 나를 조여왔고 며칠을 고민하다 나는 결국 입사를 안하기로 결정했다.




그럴 때 프리터로 일했던 그는 나에게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른이 되면 본업을 갖고 일할거야 라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 때의 나는 나 하나 감당하는것조차 벅찼고 너무 어렸다.

불안한 미래를 두고 한 발도 내딛지 못해 매일매일 울어대는 내가 그를 이해할 순 없었다.




그의 연락에 점점 답장을 하지 않는 날이 늘고, 점점 무성의하고 짧은 대답만이 늘어갔고, 그것을 알아차리고도 다시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결국 날 포기하고 놓았을 때, 난 안심했다.




내가 버림 받았어. 그가 나쁜거야
난 그런 비겁한 생각에 안도했다.






그렇게 짧은 나의 연애는 끝이 나고, 나는 쉽게 또다시 이력서를 넣고 쉽게 또 면접에 합격하고 취업을 하게 되었다.



스물 넷 여름, 8월



그리고 난 1년 8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계속 이 곳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난 망가질대로 망가져갔고, 매일매일 일요일이 되면 월요일이 온다는 사실이 소름끼쳤고, 길을 걷다 몇 번이나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고싶다고 생각했고 결국 신경정신과에 가서 안정제를 처방 받아야했다.



그 병원을 나오며, 나의 엉망진창인 현실을 보며 비로소 절망 속에서 또다시 난 일어서리라 다짐했던 것 같다.



스물 다섯의 여름.





다영이가 워킹홀리데이에 가고싶다고 나에게 말해왔을 때, 일본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날 다시 구원해줄거라 믿고 선택한 길.








그게 스물 여섯에 떠난 나의 오사카 유학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날 이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