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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 Mar 03. 2016

처절하게 거리를 두었다.

고독하고 싶었으니까.


학교로 돌아갔다.

재수, 휴학으로 보낸 2년이라는 시간.

어느덧 스물두 살이 되었고, 두 살 어린 동생들과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내 앞엔 또 하나의 수식어가 생겼다.

'복학생'


그 수식어 덕분에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 삼아 처절하게 혼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낯선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그들의 친절이 두렵고 겁이 났다.

누군가를 곁에 두면 다시 기대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과거와 같이 애정을 갈구하고, 또다시 내가 외로워질 거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



학교 생활은 일 년 전보다 괴롭지 않았다.

무리 속에 들어가 어울리려 애쓰지 않아도 좋았고, 점심시간에 매번 밥을 사 먹어야 하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좋았으니까.



외롭고 고독하다 느낄 때도 있었지만 혼자 있는 편이 나았다.



복학하고 맞이한 1학년 2학기 내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겨우 고시원을 벗어나 보증금 100만 원짜리의 원룸을 구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대학동(신림 고시촌)에 있어서 학교와는 꽤 멀었다. 버스로 지하철 역에 가야 했고, 지하철로도 한 번 더 환승을 하고 가야야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선 넉넉히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집이 생겼다는 게 힘든 통학 길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너무나 기뻤다.



정말 행복했다.


지하철을 타고 지나가며 늘 수많은 집들을 보며 언니와 수도 없이 버릇처럼 했던



서울에 이렇게나 집이 많은데 왜 우리는 고시원에 있어야 할까.

그 말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내 삶이 바닥의 끝으로 떨어지고 떨어져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걸 인식시켜 주던 그 무수히 많던 집들.


비록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인 작은 집이었지만 나의 집이 생겼다는 게 정말 행복했다.



복학을 하며, 통학이 멀어진 까닭에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었다. 

강의는 늘 1교시부터 있었고 모든 강의가 끝난 후엔 부랴부랴 뛰어서 아르바이트를 갔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늘 밤 11시가 넘었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보면 새벽 1시였고, 도시락을 만들고 과제를 하다 보면 새벽 3시가 되어있었다.


강의가 끝나면 동기들과 후배들은 모두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그 모든 것들이 부러웠지만 무엇 보가 가장 갈망했던 건, 마음껏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마음껏 책도 읽고 싶었다.

하지만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 시험을 위해서는 매 시험 때마다 도서관에서 며칠 밤을 새워야 했다. 시험 기간에는 수두룩 하게 모르는 단어가 제출되었고 난 그 공부를 위해 모든 아이들이 갖고 있는 전자 사전도 갖고 있지 못한 현실을 마주할수록 괴롭다 느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비웃듯, 교수님들께선 항상 당연한 듯이 모르는 단어들을 강의마다 나누어주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난 그다지 말을 섞지 않았던 후배들에게 전자 사전을 빌려야 하고, 그러지 못했을 땐 내 차례가 오는 것에 전전긍긍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하루는, 전자 사전이 없는 나에게 한 교수님께서 너무나 가벼운 말투로


전자 사전이 없으면 공부할 때 불편하지 않니?
하나 사는 게 어때?



라고 하셨다. 

전자 사전을 사려면 적어도 20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차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지만, 6개월을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나는 어렵게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고 말았다. 정말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전자사전을 구입했고, 졸업도 하기 전 취업을 한 쌍둥이 언니가 용돈을 주기로 했다. 

난 결국 아르바이트를 그만뒀고 학교 생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가 실컷 하고 싶었던 내 꿈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난 2학년이 되었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늘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서 매일매일 일본어 공부를 했고, 질릴 만큼 읽고 싶었던 책들도 잔뜩 읽었다. 점심은 늘 도시락이었고, 도시락이 아닌 날엔 친한 동생과 컵라면과 김밥 한 줄을 나누어 먹었다. 한 끼에 2000원을 쓰면서도 통장 잔액을 생각했고, 시험이 끝나는 날엔 기분을 내자며 5000원짜리 백반을 먹으며 학교 생활을 했다.



덕분에 학기 성적으로 4.2라는 성적을 받았다.

1학년 1학기 2.8이라는 성적과 비교하면 놀랄만한 성적이었다. 장학금은 받지 못했지만, 모두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하게 된 공부, 그리고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학교에서는 취업 설명회와 인턴 설명회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 하나의 작은 꿈이 생겼다.



일본에 가고 싶다.

동기들 중에선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동기들이 있었고, 유학을 준비하는 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초기 비용이 발생하는 것들이었고, 당장 월세 40만 원에 허덕이는 내가 몇 백만 원이 드는 워킹 홀리데이, 유학을 갈 형편은 되지 않았다.

학기는 한 학기만 남겨둔 채였고, 졸업 후엔 취업을 바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취업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가정 형편이 아니었고, 나 또한 일본어라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의 내 일본어는 형편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동기들에 비하면 자격증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자격증 시험 응시료조차 부담이었고, 혼자서 자격증 공부를 하는 것에도 한계가 많았다. 어떻게든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신문 장학생이라도 해볼까 하여 여러 곳을 찾아봤지만 자격 조건이 남자인 곳이 많았다. 당장 졸업은 다가오고 있었고 점점 더 불안감은 커져갔다. 무엇보다 일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생긴 꿈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50만 원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자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거짓말 같은 무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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