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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오 Dec 01. 2020

좋은 책을 만들면 독자들이 알아줄 거라는 일말의 믿음

만으로 3년이 된 편집자는, 그렇게 다시금 낭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저자와의 인연은 2018년 말, 출판계에서 셀럽이라 불리는 어느 유명 작가의 강연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명 작가를 섭외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패기 넘치는 신입 편집자였던 나는, 작가에게 포스트잇으로 질문했다. “혹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꼭 써보고 싶은 글이 있나요.” 유명 작가는,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현장실습생을 다룬 글을 쓰고 싶다”고 답변했다. 알고 보니 그 자리에 저자가 스텝으로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명 작가는 은유 작가님이고 실제로 2019년 6월, 현장실습생 문제를 다룬 르포 인터뷰집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2019)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 만남 이후 2년이 지났다. 온라인 독서모임, 출판편집자 양성과정 <호모 에디투스>, 온라인 글쓰기 모임 등 저자와 꾸준히 접점을 이어나가다, 작년 12월, 매주 한 편씩 원고를 쓰고, 피드백을 주고받고, 독자들에게 선보이면서 책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며 브런치 연재를 제안했다. 이러한 발상은, 저자에게 출간을 제안할 때 신문 연재 코너를 잡아 2년간 원고를 모아 책으로 묶었다는 어느 편집자의 편집후기를 보고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 편집자는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난 이환희 편집자님이고, 그분이 당시 편집한 책은 은유 작가님의 <다가오는 말>(어크로스, 2019)이었다. 이토록 많은 우연과 인연 중 한 가지만 어긋났어도 이 책은 내 손을 거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책 기획 단계에선 여러 가지 욕심으로 가득했다. 신인 저자를 발굴하고 싶은 마음, 굵직한 사회 담론을 다루고 싶은 마음, 편집자로서 색깔을 만들고 싶은 마음, 아직 다뤄지지 않은 좋은 이야기를 선보이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 편집자로서 성과를 내고 싶었다. 이 책은 분명 많이 팔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그렇게 올해 1월을 맞아 연재를 시작했고, 매주 한 편씩 원고를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주위를 맴돌았다. 이미 완성된 원고를 받아 책을 만드는 걸 넘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글을 써나간다는 기분은 짜릿했다. 정말 내가 편집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한껏 취해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피드백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여느 때처럼 글을 보내온 어느 날, 원고를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글이 너무 아팠다.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과연 이 글에 내가 피드백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자격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의 진솔한 이야기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주었다. 그 불편함은 두려움으로, 부끄러움으로 번지곤 했다. 글을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해야 하는 편집자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는 한 명의 독자만 남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원고가 책 한 권 분량만큼 쌓여 있었다. 기획 단계에서 가득했던 욕심은 어느새 사라졌다. 성과를 내는 걸 넘어, 이런 책은 꼭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확신했다. 만으로 3년이 된 편집자는, 그렇게 다시금 낭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좋은 마음을 담아 좋은 이야기를 엮어 좋은 책을 만들면, 독자들이 반드시 알아줄 거라는 믿음. '적어도 나는, 좋았다'라는, 이토록 일차원적이고 근거도 없고 책임감 없는 말을 핑계로 편집자 개인의 감상을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편집자로서는 빵점이었다. 다만 좋은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길 바라는 독서가의 마음이 더 강했다는 게, 이번 책을 세상 밖에 선보이며 느끼는 솔직한 심정이다.


"현장실습생을 경험하지 않은 편집자가 현장실습생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편집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특혜이자 권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불편함은 필연적이다. 그 불편함은 두려움으로, 부끄러움으로 번지곤 했다. 이러한 감정들은 한편으론 이 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수 있게 한 강력한 동기이기도 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현장실습생/청년노동자로 살아온 한 사람의 인간을 알게 되었고, 이는 곧 집단 혹은 숫자로 표현되는 동안 자연스레 삭제되었던 한 명의 개인을 복구시키는 일이었다. 책을 만들어 판매한 돈으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편집자에게 일말의 쓸모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누군가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일일 것이다. 이번 책의 첫 번째 독자였던 나는 스스로 느꼈던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며 불특정 다수에게 퍼뜨리며 책임을 전가하는, 이처럼 무책임한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감 있게 해내고 말았다." - 편집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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