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오 Feb 07. 2021

그럼 꿈꾸는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없다는 얘기잖아요

내가 너무 낭만적인 걸까, 이기적인 걸까, 환상에 머물러 있는 걸까

- 헤어지라니까.
- 이 오빠는 맨날 헤어지라네. 그러지 말고...

테이블에는 온갖 안주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취기가 얼큰하게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도 나와 사정이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지인도 있었고, 술에서 깨기 위해 물을 연거푸 마시는 지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술자리가 시작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해주는 증표는, 연애 고민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지인의 모습과, 그 고민을 두고 양극단에서 대립하는 몇몇 지인의 모습이었다.

A는 20대의 절반을 연인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 다만 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며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A의 연애는 최근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A의 연인은 몇 년 전부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늘 가까이서 연인을 응원해주고 기다려주던 A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큰 거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고 싶을 때 만나는 게 소원인데 그마저도 어렵다는 게 너무 힘들고 서운하다며 A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에 B 형은 헤어지라고 얘기했고,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몇몇 지인이 반대하고 있었다. 나 역시 A의 예쁜 연애를 오랫동안 지켜본 입장이기에, 취업 문제로 헤어지는 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다.

- 결국 우선순위가 뭐냐는 거지. 시험 준비 때문에 바쁘고 힘들 수는 있는데, 그래도 연인이 힘들어하고 보고 싶다고 하면 만나야지. 아니, 그게 어렵다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지.

지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가, B형의 말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행님 말씀도 맞는데... 시험 준비하는 입장에서 연인이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만나고, 그때마다 같이 밥 먹고 데이트하면, 시험에 붙을 확률이 더 낮아지잖아요. 그렇게 시험에 떨어지면 또 그거 때문에 사이가 더 안 좋아지고...
- 그러니까 헤어지라는 거지. 그게 서로 안 맞는 거잖아. 서로 바라는 게 다른 거고. 그럼 여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거가. 그건 아니잖아.
- 아니, 이 오빠들 또 싸우네...

B 형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사랑을 이어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서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배려하면서 사랑을 지키는 연인도 많았다. 다만 이러한 노력이 일방적으로 흘러간다면 배려는 희생이 되어버린다. A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점이 힘들고 또 어떤 구체적인 고민이 있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그럼에도 가까운 지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고민의 무게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걔도 연인이랑 미래를 꿈꾸고 있으니까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는 거잖아요. 그게 하고 싶은 일이든, 아니면 미래를 꿈꾸기 위해 돈을 버는 일이든. 그런데 취업이든 시험이든 그게 한순간에 뚝딱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연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긴 한데, 당장 눈앞에 놓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엄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시험을 준비하는 건데. 그 행위 때문에 헤어지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 그러니까 취업이든 시험이든 그거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걸 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냐는 문제라고. 너 말대도 목표를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근데 그게 우선순위가 되어버리면 상대방은? 상대방이 아무리 힘들어해도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그런 거가?

정작 고민을 이야기한 A는 어느새 토론에 빠져 있었고, 나와 B 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몇몇 지인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또 몇몇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술자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그럼에도 B 형의 말에 완전히 납득할 수 없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그런 논리라면, 꿈꾸는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게 있어도 연인의 말 한 마디에 당장 만나러 가야 한다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취업보다 연애가 중요하면 당연히 취업이 안 되고, 시험보다 연애가 중요하면 당연히 시험에서 떨어지잖아요.
- 연애보다 중요한 게 많으면, 그거 하면 되겠네요. 그럼 연애 못하는 거죠. 꿈도 자기 꿈이지.

묵묵히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A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B 형의 반론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민의 당사자가 저렇게 얘기하니, 그 고민에 대해 열심히 주장을 펼치던 나의 행위는 곧 명분을 잃고 말았다.

- 그건 그냥 니 고민 아니가. 니가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안정적인 직장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에 다니니까, 그런 생각하는 거 같은데.

A의 대답에 이어서 들려오는 B 형의 얘기는 정곡을 찔렀다. A의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나의 불안과 고민을 말하고 있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A의 남자친구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던 걸까. A의 연인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자그마한 회사에 다니며 내 분야에 자리 잡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비슷한 점이라면, 한 방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긴 했지만, 누군가와 미래를 꿈꾸기 위해선 현실적인 고민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누군가와 만나는 일 자체가 버겁게 다가왔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려줄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걸까.

- 뭐, 그렇긴 한데...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는 연인과의 갈등. 사실 흔한 사연이잖아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 사회초년생이면 누구든 겪을 법한 상황이고요. 그런데 저는, 제 주위에 '그래서 결국 헤어졌다'라는 커플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했다'라는 커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힘든 게 맞긴 한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헤어지는 게 맞는 상황도 분명 있는데, 그걸 사랑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싶어요. 왜냐면 그런 경우가 잘 없으니까. 그냥 적당히 조건 비슷한 사람 만나는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 그러니까 니 이상을 왜 다른 커플한테서 찾냐고.
- 저도 그런 고민 많이 하니까요. 주위에 그런 사람 많으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잖아요. 저도 엄청 불안하고 흔들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이 사랑을 잘 지켜나가는 모습을 바랄 수는 있잖아요. 연애뿐만 아니라 다른 거도 그렇잖아요. 그렇게 서로 모습 보면서 힘도 얻고, 희망을 가지고.

B 형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 갑자기 왜 자기 고민 이야기하고 있노. 아끼는 동생이 힘들다는데 위로해줘야지, 동생 남자친구 입장을 대변하는 건 뭐고.
- 그러니까 오빠가 연애를 못하는 거예요. 에휴. 공감을 하세요, 공감을.

B 형에 이어, 열띤 토론을 한참 듣고 있던 다른 지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더 이상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취기가 꽤 많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술을 조금 더 먹고 싶어, 남은 술이 없는지 테이블 위를 둘러보았다. 술 없네요. 더 시킬까요? 아니, 많이 먹었다. 이제 가자. B 형의 말에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새벽 1시가 넘었다는 걸 확인하곤 차마 더 마시자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럴수록 못다 한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낭만적인 걸까, 이기적인 걸까, 환상에 머물러 있는 걸까,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렸다가도, 현실적으로 어려울지 몰라도 그런 이상을 품어볼 법하지 않냐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택시가 어두운 밤을 라이트로 밝히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이란 이토록 무섭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