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어느 새벽. 다음날 출근을 위해 얼른 자야 했지만 정신이 말똥했다. 책이 주는 여운 때문이라고 한다면 조금 민망하지만, 딱히 다른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책 내용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저자는 그저 자신이 보고 겪은 걸 담담히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책이 주는 아픔과 불편함은 촉수처럼 뻗어 나와, 계속해서 나와 연결되려 했다. 이후 경비복을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저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책은 내가 그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다. 이후로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 역시 이런 책을 기획하고 싶다고. 나의 세계를 과감하게 무너뜨렸던 책은 바로 <임계장 이야기>(후마니타스, 2020)이다.
지난 6월, 가시화되지 않은 노동에 관한 책을 기획하고 싶었던 나는, 마침 구독을 시작한 <시사IN>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시사IN 666호에 실린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 없이 ‘돌봄과 방역’이 가능할까> 기사였다. 나는 인터뷰 내용을 보며 크게 공감했고, 방과후강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기획하고 싶다며 무작정 저자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저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저자는 미리 써 놓은 글도 없었고, 신문사나 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거나 연재를 하고 있지도 않았다. 운이 좋아 출간이 결정되긴 했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글을 쓰고 싶냐는 물음에 저자는 곧장 50여 개의 글 소재를 보내왔다. 안심이 되긴 했지만, 저자가 기자회견, 농성, 간담회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기에 정기적으로 글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과연 원고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불안감에 사로잡힐 무렵, 저자는 주말이나 공휴일, 명절 연휴에 원고를 대여섯 편씩 보내왔다.
언젠가 추운 겨울 농성장에서 휴대폰으로 꾹꾹 눌러쓴 원고와 마주했을 때, 책을 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넘어선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저자가 개인의 생존을 넘어 동료 강사들의 권익과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피켓을 들고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정작 책을 제안한 편집자는 책상에 앉아 모니터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참 부끄러웠고, 불편했다. 책은 사무실이 아닌 찬바람이 부는 농성장에서, 먼지가 휘날리는 거리에서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이라 생각하고 제안했는데, 작업 과정에서 그런 믿음이 철저히 깨졌다. 한 편 한 편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글들은 선후관계를 바꿔버렸다. 어쩌면, 어떻게든 세상에 나와야만 하는 책이 아니었을까.
저자가 보내온 50여 개의 조각은 너무나도 뜨거웠고, 또 날카로웠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가 주는 아픔이었고, 내가 바라보던 편협한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이었으며, 우리 사회가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성찰하게 만드는 뜨거움이었다. 세상에 반드시 나와야만 하는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는 게 편집자가 가지는 일말을 쓸모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나는,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고자 새로운 세계에 촉수를 뻗었다. 연결은 언제나 그렇듯 아프게 다가왔다. 그 뜨겁고 날카로운 조각들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몸 여기저기 흉터가 생겼다. 책 만드는 일을 손에서 놓는 그 순간까지, 이 흉터들을 보며 편집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 두고두고 생각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