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3월 당시 한국신문협회 사무총장인 최영정은 <신문과 방송>에 글을 썼다. 제목은 “서비스 저널리즘의 시대.” 부제는 ‘뉴스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가?’였다. 2017년 1월 <뉴욕타임스>는 2014년의 혁신 보고서와 2015년의 전략보고서(Our Path Forward)에 이어 ‘독보적인 저널리즘’(Journalism That Stands Apart)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 뉴욕타임스는 향후 추구해야 할 가치와 방향으로 ‘서비스 저널리즘(Service Journalism)’을 지목했다.
1970년대는 TV의 전성시대였다. 시청률 40~60%를 손쉽게 넘는 시장이었고, 바쁜 일상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순서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정한 시대였다. 뉴스를 보기 위해서 종종걸음으로 퇴근시간을 당겼고, 뉴스를 읽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신문사업자들이 들고 나온 기치가 ‘서비스 저널리즘’이었다. TV 전성시대에 대한 응전이었던 셈이다. 최영정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활자를 기피하는 세대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보다 매력적인 신문을 만드는데 역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서비스 저널리즘’의 조류가 여기에서 나온 듯하며, 독자의 호, 관심 등과 신문제작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지금 한창이다.”
21세기는 디지털에 대한 응전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고, 70년대를 이끌었던 TV조차도 퇴물로 취급받는 시기다. 사람들이 미디어에 맞추는 시대가 아니라, 미디어가 사람들의 동선에 맞추는 시대다. 쓰기만 하면 찾아오는 시대가 아니라, 찾아가도 이런저런 핑계로 읽어보지도 않는 시대다.
그렇게 뉴스 사업자와 독자의 관계가 역전되었다. 과잉의 시대이니, 설사 괜찮은 기사를 작성한다고 하더라도 독자나 수용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낙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은 시대다.
다만, 그동안 디지털 혁신을 추진한 덕분에 고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물리적 통로는 그럭저럭 마련했으니, 이제는 자기들이 옳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콘텐츠뿐만 아니라 고객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만들어서 주겠다는 의지, 그것이 ‘서비스 저널리즘’이다. 시장의 어법으로 표현하면 ‘독자 기호 맞추기’인 셈이다.
독자의 기호 맞추기를 단순히 독자를 추종한다거나 독자가 원하는 것만 제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는 말자. 그 어느 순간에도 뉴스 사업자는 자신들의 본연의 위치를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외연을 넓히기 위해서 지금까지 해 오던 뉴스와는 다른 시도를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플러스알파다.
다만, 전략적인 선택이 항상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않는다. 전략이 마주해야 하는 사회적 현실에 부합해야 한다. 일단 1970년대 신문사업자들이 꺼내 든 ‘서비스 저널리즘’이란 전략은 성공했다. 월요일은 비즈니스, 화요일은 패션, 수요일은 시사 등으로 특별 세션으로 무장한 당시의 서비스 저널리즘은 구독수익을 높였고, 광고 수익을 높였다.
경성 뉴스가 지배적이던 뉴스 시장에서 소위 연성형 뉴스가 자리 잡았다. 경성 뉴스가 신문사업자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한정되었다면, 연성 뉴스는 뉴스가 경제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광고 수익의 증가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1970년대의 스낵형 뉴스였던 셈이다.
2010년대에 불기 시작한 ‘서비스 저널리즘’은 70년대 광고 수익의 증가란 결과에 주목했다. 디지털 가입자가 증가하고는 있지만, 그 속도가 광고 수익의 감소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면 뉴스 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디지털 가입자를 더 늘리는 것과는 별개로 광고 수익 감소를 늦추거나 반전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과거의 성공담은 귀를 쫑긋 세우기에 걸맞았다. 과거의 복원. 1970년대 신문 광고 시장의 전성기를 열었던 그 시절의 비법, <서비스 저널리즘>을 소환한 것이다.
“1970년대 새로운 섹션을 만들던 것에 착안을 했다. 당시에도 광고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 섹션을 만들었다. 독자들이 매일같이 고민하는 먹는 것, 입는 것, 해야 할 것들을 우리가 알차게 제언해 줄 수만 있다면, 독자들은 우리를 봐줄 것이고, 덩달아 광고 시장도 만들어질 것이다.” <Journalism That Stands Apart>
The Times’s current features strategy dates to the creation of new sections in the 1970s. The driving force behind these sections, such as Living and Home, was a desire to attract advertising. The main attractions for readers were our ability to delight and to offer useful advice about what to cook, what to wear and what to do. The strategy succeeded brilliantly.
그러나 과거의 해법이 오늘의 성공 원칙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서비스 저널리즘’이란 용어를 쓰고 있고, 목적도 같지만 처한 상황이 너무도 달라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다. 일단 해법에 이르는 과정은 제법 그럴듯하다.
정보와 지식이 과잉되어 있는 반면에 ‘신뢰’할 만한 정보가 부족하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찾기 힘들다. 그러니 믿을만한 언론사가 나서서 그 역할을 해 준다면 독자들이 시장의 빈 곳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은 합리적이다. 뉴욕타임스가 결연하지만 ‘서비스 저널리즘’의 가능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법이 성립할 수 전제가 이미 무너져 버렸다. 70년대의 서비스 저널리즘이 TV를 염두에 둔 연성화 전략이었다면, 2010년대의 서비스 저널리즘은 정보 과잉 시대의 큐레이션 성격이 강하다. 큐레이션형 서비스가 성공하려면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이 모여 있는 곳이어야 의미를 가진다.
멜론이 큐레이션 서비스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일반 웹 서비스에서 좋은 곳이라며 큐레이션을 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부분 정보는 불완전하기에 큐레이션의 의미를 각인시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사실상 담고 있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큐레이션 서비스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부분 정보만을 가지고 있는 뉴스 사업자가 ‘서비스 저널리즘’이란 이름으로 섹션형 큐레이션 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1970년대의 효과를 보긴 힘들다.
이미 그런 류의 큐레이션 서비스는 널리고 널려 있고, 웬만한 기자의 수준을 넘었다. 덕후들이 직접 큐레이션을 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독자 우선주의가 먼저다.
70년대가 지면의 섹션이라면 지금은 독립형 서비스(vertical service)로서 ‘서비스 저널리즘’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요리를 분리해서 별도의 앱으로 내는 것도 뉴욕타임스는 ‘서비스 저널리즘’의 범주에 포함시키니 말이다.
뉴욕타임스는 <Our Path Forward>에서 "The effort to modernize our service journalism began with Cooking a year ago"라고 쓰고 있고, 얼마 뒤에 독립 앱으로 출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비스’란 단어다. 서비스는 극단적으로 고객 중심이어야 한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가 제창한 ‘서비스 저널리즘’에는 공급자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서비스 저널리즘’의 당위를 설명하는 대목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Our readers are hungry for advice from The Times.”
조언과 충고다. 여성 위에 군림하려 했던 남성의 지나친 설명(mansplain)처럼 고객 위에 군림하고 있는 journalplain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표현이다.
스스로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강해서 고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용어다. 이 journalplain을 버릴 수 있다면 ‘서비스 저널리즘’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생기고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하는 조어가 될 수도 있다. 바로 ‘독자 우선주의’다.
70년대 서비스 저널리즘은 독자의 기호에 맞추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독자를 몰랐다. 독자를 모르면서 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간주한 셈이다. 읽을 것이 넘쳐나지 않았던 세상이라 이 정도의 기획만으로도 시장은 반응했다.
그러나 2018년 오늘은 독자를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고,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세상이다. 적어도 독자의 그림자라도 그릴 수 있는 세상이다. 패션이나 요리, 그리고 라이프스타일과 같은 디지털 섹션을 파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디지털 섹션이 공급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독자의 필요와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국범근이 주목받는 건 그는 자기 또래를 알고 또래의 필요를 알기 때문이지만, 오늘날 뉴스 사업자들은 수용자를 모른다. 그러고는 수용자의 기호에 맞추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서비스 저널리즘’이라고 쓰고, ‘독자 우선주의’라고 읽는다면 2018년 오늘 하고자 하는 ‘서비스 저널리즘'이 소환이 아니라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고쳐야 한다. 독자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는다. 독자들을 훈육시키려 하지 않는다.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독자를 제대로 알아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콘텐츠를 제공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서비스 저널리즘'이다. '군림'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서비스 저널리즘'이다.
독자가 먼저다.
1. 서비스 저널리즘에 관해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분은 김영주, 정재민, 강석 (2017). <서비스 저널리즘과 언론사 수익 다변화>를 읽어보시면 좋을 듯싶다.
2. 서비스 저널리즘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의 변화와 공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글쓰기 작업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 분은 이정환 (2017. 10). 실천 제안 - '솔루션 저널리즘': 팩트와 진실에서 한걸음 더, 최선의 해결책까지. <신문과 방송> 2017년 10월호를 읽어 보시길 권한다.
3. 최영정(1978. 3) 서비스 저널리즘의 시대. <신문과 방송> 1978년 3월호
이 글은 방송기자연합회 회지인 <방송기자> 1,2월호에 게재한 것을 방송기자연합회의 동의를 얻어 올립니다. 지면 관계상 생략했던 일부 내용을 되살린 글이라서 pdf 버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