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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신 Oct 07. 2024

Dark한 갱스터 무비(1927~1939)

시장의 변화를 감당한 The Merger Maverick (2)

이제는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글로벌 미디어 기업이 걸어온 길을 사업자별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일종의 풍향계라고 할 수 있는 워너 브라더스에서부터 시작해서 파라마운트, 디즈니 등 북미 사업자를 살펴보고, 동남아시아의 주요 미디어 사업자를 살펴보고자 한다. 끝을 기약하지 않을뿐더러, 먼저 썼던 내용도 수시로 수정하면서 진행할 계획이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재즈 싱어 (1927년)는 워너 브라더스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시켰다. 상업적인 대성공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 시장을 선도한다는 이미지까지 얻었다.  다른 사업자들이 주저하던 비타폰(Vitaphone)을 과감히 도입했던 그들의 무모함은 시장 호사가들에게는 찬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유성 영화를 강력히 추진하던 샘 워너(Sam Warner)는 개봉 하루 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형제들은 샘의 사망에도 상영을 강행했다. 그것이 샘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터. 그러나 샘의 사망은 독불장군인 잭(Jack)과 보수주의자였던 해리(Harry)를 중재할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불행이 닥쳤을 때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사람이 있었더라면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법이다. 샘의 사망은 그런 일이었다. 


사업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첫 유성영화를 찍었던 워너는 이듬해인 1928년 최초의 100% 유성 영화인 Lights of New York을 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와 음향을 녹음한 작품이다. 이 대목에서 워너는 매우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한다. 


100% 유성영화 Lights of New York


유성영화를 만든다는 건 단순히 영화 제작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작된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유성영화를 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워너는 8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대부분은 서부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20,000여 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추정해 보면, 대략 1% 정도인 200개 정도의 극장만이 유성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즈싱어>에 이어  <Lights of New York>을 준비하고 있던 워너는 극장수를 늘리기 위해서 인수전에 나섰다. 당시는 영화사가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극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가 부족하게 된다. 28년 초 워너는 25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던 Stanley Company를 인수했고, 7월에 <Lights of New York>을 상영한다. 그리고 상영 중이었던 28년 11월에 60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던 First National Pictures를 인수했다. 이로서 워너는 930여 개의 극장을 소유한 대형 극장주가 되었다. 파라마운트가 1,200여 개로 가장 많은  극장을 보유하고 있었고, 폭스가 600개 정도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의 인수로 워너는 단번에 파라마운트에 이어 2위 극장주 사업자가 된 것이다. 이제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시가 대폭락 했다. 기업과 은행은 파산을 했고, 대규모 실직사태가 일어났다. 미국에서만 전체 노동력의 1/4에 해당되는 1,5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을 정도다. 사회적 갈등이 폭발했고, 삶의 질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영화 시장은 버텼다. 여기서 버텼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섹터에 비해서 선방했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과거 대비 더 높은 성장을 기록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재즈 싱어> 상영 당시 대략 7억 불 가까웠던 시장이 1933년에는 4억 불까지 떨어졌고, 1939년이 되어서야 10년 전 수치인 7억 불 수준이 되었다. 매주 극장에 가는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대공항기 초기에 감소했다가 1933년 뉴딜 정책 이후에 조금씩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았던 극장 산업이 뮤지컬 등 고가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영화가 많이 등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https://ecommons.udayton.edu/cgi/viewcontent.cgi?article=1023&context=pol_fac_pub



어찌 되었던,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지, 모든 사업자가 동일한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니다. 너무도 단순한 수요 공급 곡선이 이 시장에도 적용된다. 관람객의 숫자는 더 늘지 않았으나, 그나마 선방하는 사업이었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버텼고, 누구는 몰락했다. 워너는 상대적으로 선방한 사업자였다. 상대적으로 영화제작-배급-극장까지 수직적 결합을 완성한 사업자들이 시장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수직적으로 통합된 영화사는 역사상 가장 저렴하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시대라고 영화사 전공자들은 말할 정도다. 그러나 춘궁기에 과도한 투자를 했던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1932년 기준 23,000개의 극장 중 8,000개가 문을 닫아야 했고, 대규모로 제작된 영화의 70% 이상이 손실을 기록해야 했던 시대였다. 


대공황 초기에는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금융 자본이 영화업계에 직접 뛰어들어서 관리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비전문 영화인이 CEO가 되어서 임금삭감, 비용절감 등 구조조정을 진행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중기부터는 1933년을 전후로 해서 영화인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영화사별로 생존의 방식은 다양했다. 

파라마운트는 대작을 선호했다. 세실 B. 데밀(Cecil B. Demille, 1881~1959) 감독이 제작한  <십자가의 성호>(The Sign of Cross, 1932)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 1934) 등이 대표작이다. 세실 감독은 십계로도 잘 알려진 감독이다. 어찌되었건 흥행에도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막대한 예산 때문에 이익은 크지 않았다. RKO 라디오 픽처스는 킹콩(King Kong)을 제작했고, 폭스는 존웨인(John Wayne)을 주연으로 한 <빅트레일>(The Big Trail)을 제작했었다. 


(쉬어가는 영화 상식)
재즈 싱어(1929)부터 Tarzan and His Mate(1934) 사이에 만들어진 영화를 Pre-Code 영화라고 한다. 유셩영화 이후에 영화 내용에 대해서도 규제를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Hays code였는데,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적용되었다. Pre-Code 영화는 다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들이 많았다.


그러나 워너의 선택은 달랐다. 워너는 대형 제작을 기피하고 저비용 고수익 전략을 취했다. 그리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바로  갱스터 무비였다. 


<Public Enemy>(1931)은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가 주연한 갱스터 영화였다. 이 영화는 대공황 시기의 범죄 증가와 사회적 혼란을 반영한 덕에 큰 인기를 끌었다.  폴 무니(Paul Muni)가 주연한 <I am a Fugitive from an Chain Gang>(1932)은 미국 형사 제도의 문제점과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제작비가 저렴했고, 비평가의 호평을 받았다. <Angels with Dirty Faces>(1938)은 캐그니와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가 주연한 갱스터 영화 중 하나다. 물론 워너도 42번가(42nd Street)(1933)과 <Gold Diggers of 1933>(1933)과 같은 뮤지컬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었다. 42번가의 경우 42만 불 정도의 제작비를 투입해 제작비의 5배가 넘는 2백2십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는 성공을 거두었다.


다행히도 샘의 죽음 이후에 해리의 보수적인 성향과 잭의 무모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잭의 독단적인 성격으로 추진했던 영화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워너 영화의 특성이다. 잭은 관객들에게 현실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영화에 매력을 느꼈고, 그 결과 워너 브라더스는 사회의 문제점을 조명하는 영화들을 많이 제작했다. 범죄와 사회적 부조리를 사실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선호한 탓이다. 그러나 불안의 불씨는 여전했다. 1930년대를 지나면서 잭의 독단적 성격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워너의 최고 배우였던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와 잭과의 불화는 당시에는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1930년대 대 불황의 시대를 워너는 넘어섰다. 


그러나 1940년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또한 1948년에는 불황을 넘어설 수 있었던 제작-배급-극장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결합에 대한 단호한 조치가 내려졌다. 파라마운트 판결이 바로 그것이다. 제2의 극장주였던 워너도 이 고리를 끊어야 했다. 워너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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