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았다. 군사적 인도적 지원만 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1백만 명의 미군이 희생되었고, 참전 반대 국민 여론이 들끓었던 탓이다. 물론 군수 물품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긴 했었고, 뉴딜 정책의 약발이 약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호황의 시작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침공 사건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시작한다.
할리우드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도약할 수 있었다. 영화는 가장 중요한 선전 수단이었다. 물론 선전 영화 그 자체로 할리우드가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애국주의는 사람들의 심장을 끌어올렸고, 극장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무기였다.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에게는 영화만 한 안식처가 없었다. 윌리엄 와일러의 Mrs.MIniver(1942)나, 둘리틀 공습을 다룬 Thirty Seconds Over Toyko(1944), Sahara (1943) 등 전쟁 영화들은 대중에게 전쟁의 현실과 희생을 강조하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워너 역시 대공항에서처럼 사회적 메시지로 무장한 전쟁 영화 등을 제작했다. 미국 참전 직후 상영한 <카사블랑카> (1942)는 그 자체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희생, 정치적 배경을 잘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아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또한 <Yankee Doodle Dandy> (1942) 역시, 전쟁 지원 활동을 그린 조지 M. 코핸의 전기 영화를 제작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0년대 Warner Bros.의 대표작품
1930년 말부터 각광받기 시작하던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도 워너는 디즈니와는 조금은 다른 성격을 드러냈다. 루니 툰즈(Looney Tunes)와 메리 멜로디즈(Merrie Melodies)는 1930년대 워너의 대표적인 단편 애니메이션들의 총칭이다. 에피소드별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루니 툰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가 바로 벅스 버니(Bugs Bunny)다. 당시에는 미키 마우스의 유일한 경쟁자였다.
1938년 조연으로 등장한 벅스 버니는 1940년 정식 데뷔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벅스 버니의 성격이 까칠한 토끼로 성격이 바뀌었고, 이때 등장한 유명한 대사가 바로 "what's up, Doc?"이다. (텍사스 사투리로 Doc의 발음이 dude와 흡사하다). 물론 이런 애니메이션도 전쟁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45년 제작한 Herr Meets Hare에서 벅스 버니는 나치 독일을 조롱하고 히틀러를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적에 대한 경멸과 전쟁 승리를 고취시키는 수단이 되었고, 때론 군사교육용 자료로 애니메이션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이 기간 동안 영화는 사람들의 도피처였고, 영화관은 대중적인 오락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1946년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해로 기억되는데, 당시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총 수가 45억 명에 달했다. 당시 전 세계 인구가 25억 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대중들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 될 정도로 영화산업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친 성장이 화가 되었다. 독립극장주들은 영화사들의 횡포에 분노했다 그리고 앞으로 영화산업의 명운을 바꿀 판결이 일어났다. 소위 파라마운트 케이스(United States vs. Paramount Pictures, 1948)가 그것이다.
주요 영화사들이 영화 제작-배급-상영에 이르는 밸류 체인을 모두 통제하는 이른바 수직적 결합을 문제 삼아, 영화사들은 극장체인을 포기해야 했다.
당시 대형 영화사들은 각자 극장을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별 극장과 독점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특히 독점 계약의 형식이 블록부킹(block booking)으로 재현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블록 부킹은 대형 영화사들이 극장에 인기 영화와 비인기 영화를 묶어서 거래하는 일종의 패키지 딜을 의미한다. 흥행 영화에서 수익의 대부분이 나오는 구조상 패키지딜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 영화 제작사들은 연간 3~50편씩의 영화를 찍어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패키지딜인 블록부킹을 수용하게 되면 다른 영화사의 영화를 틀고 싶어도 틀 수 있지 않았다.
대도시엔 여러 극장이 있었지만, 중소 도시 등에서는 겨우 한 개 정도의 극장이 있었던 만큼 수직적 결합은 극장주들의 자율권을 심하게 훼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대법원은 대형 영화사들이 극장 체인을 분리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덧붙여 블록 부킹도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영화제작사들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수직적 결합은 그 폐해에도 불구하고 흥행사업인 영화 사업이 재정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1940~50년대 영화 산업의 전성기는 극장 수익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익 구조를 당시의 밸류체인별로 거칠게 나눠보면 제작이 25% 내외, 배급이 30% 내외, 극장이 45% 내외였다. 극장이 영화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수치다.
영화제작사들은 분노했다. MGM의 창립자였던 Louis M. Mayer는 대법원 판사들에게 이번 판결이 할리우드와 영화산업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며 서신을 직접 보내기도 했지만, 한번 결정 난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MGM의 창립자 Louis M. Mayer (1884 ~ 1957)
이런 상황에서 극장 체인을 많이 보유한 영화 제작사 중 하나인 워너 브라더스는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파라마운트는 극장 체인만을 별도로 묶어 United Paramount Theaters를 설립, 분리했다. (나중에 UPT는 ABC와 합병하게 된다). 반면에 워너는 1930년대 극장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 Stanley Company를 인수하면서 이미 극장을 Stanley Warner Company란 이름으로 분리 운영하고 있었다. 판결 이후 Warner는 이 회사 내에 가지고 있던 지분을 정리하면서 독립 법인으로 전환해야 했다.
RKO는 킹콩, 시민케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을 제작한 할리우드 대표 제작사였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무적 안정성을 지탱해 준 극장이 영화사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시장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P. 케네디가 설립한 것으로도 유명한 RKO (Radio Pictures, Radio-Keith-Orpheum Pictures)는 극장 분리 이후 악재가 겹쳐서 1958년을 기점으로 영화산업에서 손을 떼야했다. 미국 8대 영화사 중 TOP5에 올랐던 영화사의 몰락이었다. 반면에 대형 영화사들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독립 영화사들이 상영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플랫폼에 해당하는 극장을 놓게 된 영화사들은 제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사들의 눈에 TV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TV 시장이었는데, 극장이란 막강한 수익원이 사라진 이들에겐 TV는 제작사의 새로운 수익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의 시장으로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