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를 쓰자 1
어린 시절 몇 번의 방학을 넷째 이모집에서 보냈다. 이모 집에 가서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미술 그림 숙제를 했다. 수영장에 가고 미술 학원에 다녔다. 주말이면 이모부가 내 손을 잡고 맛있는 스테이크 집에 데려갔다. 자식이 셋인 이모에게 예민한 초등학생 여자 아이는 충분히 걸리적거리는 존재였을 텐데도 내가 이불에 오줌을 지려버린 날 이모는 모른 척 그것을 빨아줬다. '은혜'라는 단어는 이모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말이다.
실격당한 인간과 노란 집 이모 식구들
이모에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저)'을 선물했다. 책이 마음에 드냐고 묻자 이모는 꿍한 표정으로 음..이라는, 응도 아니고 아니도 아닌 길게 늘어뜨린 소리를 냈다.
이모는 똑똑하게 삶을 꾸려낸 사람이고, 그의 자식들도 똑똑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아이는 기자가 될 것이고, 둘째 아이는 회계사가 될 것이다. 셋째 아이는 이모부가 물려받은 3억짜리 땅을 물려받을지도 모른다. 이모네 식구들은 화목하고 정상적인 노란 집에 살면서 '실격'과는 거리가 먼, 가능한 한 많은 능력들을 성취하기 위해 서로서로 똘똘 뭉친 모습이다. 그들에게 나 같은 조카는 못 미덥다. 이십 대 이후로 매번 실격당하고 원점에서 멀어지는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나의 비정상성은 그들 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리하여 그녀가 내게 던져줄 수 있는 칭찬은 너 서른처럼은 안 보인다, 정도다. 아직 폭삭 늙어버리지 않아서 전시당할 가치는 남아있는 여자애 정도.
페이스톡으로 만나는 사촌 동생들은 귀여운 얼굴과 깜찍한 목소리로 나를 언니~라고 불러줬으면서, 자기 엄마 귀에는 가난하고 돈을 모르고 아무 일이나 막 하는 가영 언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속삭였다고 한다. 내 앞에서는 그런 말을 안 했으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까대는 치사한 기지배들이다. 그걸 전해주는 이모 심사는 또 뭘까.
잘 풀리지 못한 서른 넘은 조카의 인생을 안타까워하며 용돈 몇 푼이라도 쥐어주고 싶은 우리 이모. 네 성적이면 어디 어디는 갔을 텐데 잘못된 입시전략을 짰다고 욕을 먹고, 네가 서울에서만 태어났어도 몇 군데 손봐서 뭐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믿을 수 없는 비행기를 태우다가 훅, 떨어뜨린다. 아쉽고 안타깝다는 말의 총알을 두두두두 쏘아대면 방패가 없는 나는 나가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방패는 없지만 내게도 욕망과 두려움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모의 언어에는 물음표는 없고 확신에 찬 한숨들만 줄줄 흐른다. 질척거리는 한숨들을 마주 듣고 싶지 않아서 바짝 몸을 엎드렸지만, 이런 생존 전략 이전에 이모 마음속에서 이미 나는 해석 가능한 납작한 인간이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모는 내게 느낌표를 쐈다. '너 비구니 될 거 아니면, 욕심 좀 가지고 살아!' 아, 나는 또 굴러야 했다. 욕이 튀어나오기 전에 마음속에서 재빨리 은혜라는 단어를 붙든다. 그래, 우리 이모는 내가 오줌 싼 이불도 빨아줬는데, 내가 참아야지.
욕심, 욕망
인간은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두려움 때문에 주춤한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돈으로부터 생겨나는 게 싫다. 돈은 단지 필요한 것이지, 돈 자체가 가치로울 수는 없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호기심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것들에게도 밥을 줄 수 있을 정도로만 돈이 필요하다. 돈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가고 싶지 않은 직장에 출근할 수는 있지만 이모가 불쌍하다며 주는 용돈을 받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돈을 위해 갇히고 싶지 않은 공간에 몸을 들여놓고, 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곳에서 낭비하고, 내 자유를 엉뚱한 사람에게 쥐여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있지만, 기어코 그런 내 모습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할 뿐이고 나머지 내 자유와 시간과 마음을 아껴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준다. 돈을 목적으로 조각조각으로 나눠져 버린 나를 희생시키고 미래의 큰 보상을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존재들을 지켜내기 위해 돈이라는 바퀴가 달린 신발을 신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바퀴가 후져도 앞으로 나가기만 할 수 있다면 천천히 내 갈 길을 갈 거라고, 그게 의미 있다고 말하고 싶다.
충족될 수 없는 것을 좀비처럼 욕망할 때 그 사람에게 남게 될 것이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궁핍함이다. 충족이나 달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연습 가능하고, 연습하다 보면 좀 더 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들에-책 읽기나 글쓰기가 그런 일들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에너지를 쏟는 것이 인생을 조금이나마 덜 후회하게 돕지 않을까. 장강명의 말을 잠깐 빌려 쓰자면, 이 지점에 있어서는 끝까지 '내가 옳고 세상이 틀렸으면' 한다.
문제는, 내가 옳고 그들이 틀렸는데도 틀린 그들을 내가 사랑하고 마는 데에 있다. 기자를 하겠다는 동생은 어디든 돈을 많이 주는 언론사에 가겠다고 말한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말 같은 말인 듯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줬다.
- 너도 기레기가 되겠다는 거지?
-아니지, 언니. 어차피 신입은 자기가 원하는 거 못써. 나중에, 신입이 신입이 아니게 되고 내게 권력이란 게 생기면 그때 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쓸 거야.
놀랍다. 언제까지고 내가 나로 남을 거라는 확신을 이 아이는 어디서 길러낼 수 있었을까. 나중에는 네가 쓴 글자들이 너를 이겨버릴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힘을 얻게 됐을 때 페미니즘을 말하고 동물권을 말할 수 있는 네가 아니라 이재용을 사면시키는 것의 이점에 대해서 떠드는 더욱더 공고한 네가 되어갈 거라고, 네가 글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네가 쓰는 글들이 너를 만들어 갈 거라고.
그러나 나는 인내심을 부렸고 그런 말들은 일절 하지 않았다. 너는 돈을 벌어 네 부모를 봉양하고 나는 그렇지 못한 못난 인간이므로. 너는 가족을 보살피는 예쁜 짓을 하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로 나만을 위한 짓들을 꾸역꾸역 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니까. 내가 너를 비난하고 싶은 것처럼 너도 돈 없고 현실적이지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나를 비난하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너한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전화를 끊고 <하녀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열심히 읽고 잘 쓰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느릿하고 비효율적인 신체를 감당한 채로 주눅 든 마음을 펴서 읽던 걸 마저 읽어보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실패하고 마는 길 위에 있다. 실패, 또 실패.
돈에 대한 욕망
돈은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만들고, 또 돈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자유가 없는 나는 더욱더 돈을 생각하여야 마땅한데 나는 돈과 불화하고 자유를 꿈꾸는 멍청한 낮잠을 잔다. 돈이 시간이고 다시 시간이 돈으로 치환되는 세상에서 나는 내 시간을 팔아서 돈을 번다. 시간을 판다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얼마쯤 포기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돈 많은 사장님들의 축척을 위하여 나 자신을 파는 일이다. 그저 나는 돈을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어서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나 되뇌면서 돈을 번다. 내게는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하고 세상은 얼마만큼의 비굴함을 담보로 내게 돈을 줄까.
돈으로 지어진 세상이 싫다. 돈 말고 뭘로 만든 세상을 꿈꾸냐고 묻는다면 내 입에서는 이상적이고 멋모르는 대답이 움찔 튀어나오고 싶다. 돈 말고 부끄러움, 고개 숙임, 수줍음, 어쩔 수 없는 작은 선의 같은 것들로 만든 세상을 꿈꾼다. 그런 것들이 화폐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것들을 위하여 연습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배우기 위하여, 좀 더 잘 부끄럽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는 세상. 그리하여 너보다 내가 더 부끄러울 수 있고 고개 숙일 수 있는 인간임을 위시하는 세상. 그런 세상은 너무 납작해서 전혀 재미가 없겠지만, 어차피 인간들은 그 세상에서도 제각기 욕망들을 만들어 나갈 테니까 겸손한 출발선이 경쟁뿐인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쓸모없는 망상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허세,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전시, 내가 너보다 잘 해내겠다는 얄팍한 경쟁심, 누구보다 우위에 서서 권력을 맛보겠다는 욕망들을, 넘기는 페이지마다 마주해야 하는 책을 읽는 것은 불쾌하다. 사이사이에 마음 편히 들어마실 수 있는 마음씨 좋은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자주 좌절하지만 끝끝내 꺼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간들의 모습도 끼여있다면 좋겠다. 나는 도덕을 믿지 않고, 절대적인 양심이라는 것도 믿지 않지만, 복잡다단한 한 인간의 좀 더 선한 측면들은 믿는다. 납작할 수 없는 생명들의 너무 많은 색깔들 중에 노랗고 푸르고 파릇파릇한 색들이 다른 색들보다 좀 더 많이 베여있는 이야기들을 믿고 싶다. 그러면 안될 이유가 없다.
돈을 믿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을까. 돈을 믿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까. 내가 정상적이라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웃는다면 나는 정상적이기 위해 돈도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까.
무엇을 폭식하겠니
미래를 꿈꾸는 일에는 많은 색의 크레파스가 필요하고 나는 무엇이든 그려보고 싶다.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색깔을 발견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별이나 달, 반짝이는 것들을 그려 넣고 싶다. 우는 여자의 눈물에서 바람의 씨앗이 피어나고 초록바람이 별에게 폭죽을 쏘면 여자 얼굴의 다른 반쪽에 깔깔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모양을 냄새로 맡고 싶다. 그녀가 달콤한 참외나 물 복숭아를 먹었다면 그것들의 향내를 들이마시고 싶다. 여기저기 폐차들 사이로 뭐든 피어나는 모습을 놀랍게 바라보는 그녀를 그리고 싶다.
현실을 사는 일에도 많은 색의 크레파스가 있다면 훨씬 재밌겠지만 그보다는 튼실한 몸이 더 필요할까.
이곳과 불화한다는 말을 그만두고 무슨 일이든, 그 일이 호떡을 뒤집고 접시를 닦고 똑똑한 사람임을 연기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자존심을 챙기고 싶은 사람임을 표시 내는 일이든 뭐든, 유쾌하게 해내고 살아남고 싶다. 그리하여 언젠가 아이 한 명을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엄마는 밥을 짓고 두부 부침이나 된장국을 요리해서 배고픔을 해결했다, 하루 건너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면서 내가 사는 곳을 다듬었고, 이웃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고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돈을 벌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쓰레기 같은 글을 쓰면서도 좋은 글을 읽고 자꾸만 나아지고 싶어서 애썼다, 내 애인과 부모, 친구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왔다. 시간은 가버렸고, 시간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식으로 흐르지 않았고 그보다는 내가 비겁하고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주 드러냈지만 그래도 내가 부끄럽게라도 살아남았다,
그 아이에게 너도 부끄럽게 살아남고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는 인간이 되면 된다고 말해주는 엄마는 너무 염세적으로 비칠까. 애타는 말을 하나 더 남길 수 있다면, 살아남은 이후로 꿈을 꾸는 인간이 되라고 말해줄 것이다. 어떤 색깔도, 어떤 모양도 좋다. 모양도 색깔도 없어도 좋다. 남을 헤치지만 않는다면 어떤 꿈이든 마음껏 폭식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돈만 준다면 어디든 가는 인간 말고 시간이 너한테 가져다주는 재미와 의미를 먼저 폭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자라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전혀 안타깝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줄 것이다. 아, 물론 네가 네 엄마랑 다르게 폭식하지 않을 수 있을 인간이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