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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24. 2021

멋진 사람이 좋아.

  

<휴먼 카인드>를 읽고 덮어둔 지가 너무 오래된 탓이다. 선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와서 인간의 악함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란 인간의 냉정함, 무심함, 차가움, 이기심을 뒤돌아서서 목격하게 될 때면 치가 떨린다. 어깨 두 쪽과 심장 한 켠이 폭삭 무너진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다. 그런 날에 해까지 쨍쨍하게 뜨면 주저앉음에 그치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파묻히고 싶다.  

 

 Excuse me my dust. 내가 만들어내는 먼지들을 생각하면 내 존재 자체가 굉장한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이 삶 속에서 벌여놓는 실상과 다른 결을 띌 때가 허다하다. 지금 살고 있는 원룸 주방의 가스레인지 아래 선반 문을 열면 우르르, 일회용 검은 비닐봉지들이 쏟아진다. 생각과 말이 행동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깨닫고 나면 나 자신이 끔찍스러워 몸이 움츠러든다. 이건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버젓이 거기 내가 있다.


 밴쿠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그곳 생활을 시작하기 위한 보금자리를 알아본다. 학교에서 주는 보조금을 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는 글을 쓰고 뭘 먹고살지를 두고 계획을 짠다. (지구 환경보다 더) 중요한 일들은 항상 눈앞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지구 안에 사는 나는 지구를 볼 수 없고 나 자신만 너무 잘 보인다.

 쓰레기를 줄이고 분리수거를 정직하게 해내는 일보다 밥벌이를 놓치지 않는 일이 언제나 더 중요하고 만다. 타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건네는 일보다, 내가 잘 해내야 하는 일들과 잘하고 싶은 일들이 편파적으로 우뚝, 더 높게 일상에 서있다. 나의 밥벌이와 나의 욕구들만을 위하여 뇌가 수차례 회전하고 나면 눈앞의 다른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 아닌 다른 것들, 나보다 더 억울할 것들을 끝까지 볼 수 있는 힘을 다들 어디에서 얻는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해보겠다고 말한 게 5개월 전인데 제로는커녕 나마저도 쓰레기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겁난다. 제주도 여행 중에 몇 개의 플라스틱 비닐봉지를 쓰고 버렸더라. 기억나는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쯤 투고 컵을 쓰고 버린 걸.

- 이 낭비와 오염을 보소.

내가 부끄럽다고 말했을 때 맞은편의 상대방이 말했다.

-편해서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거나 조금 불편하기로 하거나


 3주 후에 한국을 떠난다. 편해서 어쩔 수 없이 살 것인가.

 본래 인생은 계획대로 흐르는 건 아니라지만 한국에 온 이후로 마음에 걸리는 짓들을 많이 했다. 음식물과 일반 쓰레기를 함께 버렸다. 스티로폼에 포장된 떡을 열 팩은 넘게 사 먹었고 여전히 일반 치실을 쓰고 있다. 쓰던 걸 마저 쓰고 썩어버릴 줄 아는 치실을 사기로 했는데 워낙 큰 걸 사서 아직도 새들이 삼켜 죽고 꼬여 죽게 만드는 치실을 쓰고 있다. 부끄러워서 이거 뭐 더 나열할 수가 없다.

 

 멋진 인간들을 많이 만나면 나도 멋져질지가 궁금하다. 멋진 인간들이 근방에 없는 탓에 '편해서 어쩔 수 없는' 인간들과만 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내 돈 주고 내가 산 물건들을 떵떵거리며 전시하고 쓰고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쓰레기가 되어간다. 혹은 나의 쓰레기 넘침을 두고 멋지지 않은 주변인들 때문이라는 치졸한 착각에 빠진다. 누구라도 비난해야 하는데 나 자신을 비난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까지 부추길 수 있는 발랄함을 부여잡지 못하는 본인 탓임을 모른(척 한)다.


 짐을 싸면서 팟캐스트 <오은의 옹기종기>, 정세랑 작가 인터뷰를 들었다. 그의 인터뷰를 듣지 않았다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근하게 벌어지고 있던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정당화를 끄집어내고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자발적으로 하는 반성이란 이미 작은 내가 더 작은 사람이 되는 자아의 축소를 경험하는 일이고 절대 먼저 손을 들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은 일은 아니고 사람을 꽤 귀찮고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나면 의도와 행동을 구분 지을 수 있고 그리하여 명명백백 못난 행동으로부터 피신하여 내가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라며 깊숙한 자아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는 일이 그중의 하나다. 나는 신이 아니므로 그럴 수 없고 신도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는 일도 어쩔 수 없이 잘 안될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이런 상황들에서나 유효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나 아닌 다른 존재들에 피해를 주는 일을 서슴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게으르고 치사한 일이다.

'네가 너무 편하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불편을 겪고 있다는 거야.' 관계를 두고 어떤 친구가 내게 한 조언이다. 세상사에 적용해봐도 무난한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의 다른 존재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신호고, 다음 세대의 다른 존재들이 집어써야 할 불편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은 곳과 다가오지 않은 곳에서 나의 풍요에 대한 값을 치르고 있고, 치르게 될 것이라고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면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조금 불편해도' 작은 행동들을 지켜할 수 있을까.


 

멋진 사람


  세상에는 휴먼이 카인드 하다고 알려주지 않아도 인간은 좋은 존재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인간들이 있다. 정세랑의 인터뷰를 듣고 있자니 그의 말소리가 별처럼 반짝거리며 들렸다. 세상에, 반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있어야지 이 여자. 언젠가 그녀가 자기 생을 다 살고 남은 돈이 있다면 어떤 새를 위해 기부하고 죽고 싶다고 말한 게 기억났다. 이 언니 멋져도 너무 멋져서 범접할 수 없다.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피프티 피플을 펼쳐서 잠깐 읽은 적 있었다. 글마저 좋았다. 나 같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카인드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미워하고 비난하고 분노하길 잘하는 나 같은 인간은 염치가 없어져서 쥐구멍에 숨어버려야 할 것 같은데, 비대한 몸은 숨길 수도 없다. 거대한 몸과 욕망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 마음이 작은 사람은 큰 마음 그릇에 오염되지 않은 욕망 무침, 그리고 그것들을 아우르는 넉넉한 몸으로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그런 멋지고 마는 사람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가 어렵다.  그런 좋은 사람이 쓰는 이야기마저도 좋아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삼켜내는 건 어렵다는 핑계로 피프티 피플을 장바구니에만 담아놨다. 옹졸한 데다 질투도 많은 인간은 숨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해서 답이 없다.


 정세랑은 여행 에세이를 내면서 더 이상 여행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여행은 여행이 꼭 필요한 사람이 가면 되고 자기라도 공간을 좀 좁혀줘야지 지구에게 덜 미안할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을 떠나면 나는 다시 제로 웨이스트에 도전해볼 수 있을까. 편해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불편해도 해보는 데까지 쓰레기를 줄여보려고 애쓰는 인간이 되어볼 수 있을까. 정세랑의 소설들을 부끄러운 마음 없이 읽을 수 있을까.

 나는 하얀색 프릴이 달린 종류의 옷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걸 싫어하면서 입어보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부릴 만큼 자발적으로 멍청하지는 않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정세랑 같은 카인드를 내뿜을 수는 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뭘 해도 조금 냉담할 거고 차가울 거고 이기적일 확률이 크다. 결국 나는 나대로 악랄하게 살 테지만 단지 좀 덜 쓰레기스럽고 싶다.


  '... 그저 그가 남긴 글을 읽었을 뿐인데 말이다. 단지 그뿐이면서 내가 그를 안다고 느끼는 것,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그가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 이건 도대체 뭐라 이름 붙이면 적당한 관계이며 감정일까.' 강윤정이 프리모 레비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며 쓴 에세이에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이다. 그 아래에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끊임없이 꿈꾸게 한다. 그곳에 먼저 가있는 그들이 내가 내딛는 발자국들을 격렬히 응원해주는 기분이다. 파묻히지 말라고.'


 만약 내가 돈을 남겨놓고 죽을 수 있을 형편이라면 그 돈이 어떤 아이가 자라나는데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을 줄여야겠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정세랑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여행을 양보할 만큼 멋질 수는 없고, 다음 여행에는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용기들을 챙겨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니까 확실히 멋진 인간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들을 필요는 있다. 멋진 인간들의 멋진 이야기들을 듣고 하나라도 건져서 나도 조금 멋진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든다면 그보다 큰 수업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짓는 이야기에서 나란 캐릭터가 인간이 악하기보다는 선하기 쉽다는 종교를 믿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도 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 삶을 좀 더 불편하게 감당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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