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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l 21. 2021

제주도와 어머니들, 그리고 글쓰기

차차 경외심을 잃고

 

현실을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장면들과 생명들에 대한 감탄을 잃지 않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 두 분을 모시고 제주도를 다녀왔다. 엄마들과 제주도 여행. 내가 낸 아이디어였다. 제주도는 미리 감탄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므로 여행 이전부터 마음이 한껏 부풀었다.  

 남자 친구는 숙소를 알아보고 대강의 여행 계획을 짜면서 어머니들이 좋아할 것들을 골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번 여행이 효도 관광이 아니라 네 명의 버디가 모두 각자 즐겁기 위해서 떠나는 자유 여행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장소들의 목록을 노트 위에 적어갔다. 너는 어디 가고 싶냐고 남자 친구에게 묻자 그는 고등어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더 묻고 싶지 않아 져서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엄마가 가보고 싶은 곳들 알려줘.' 카톡이 왔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 여행이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은 착각이었다.


 물론 시작은 언제나 상쾌하다. 서로 만나본 적 없었던 두 어머니는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하하호호 자식들에 대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우리 넷은 산에도 오르고 숲도 거닐고 미술관도 가고 사진 전시회에도 갔다. 그러나 가는 곳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상쾌함이 물러갔다. 습한 무더위와 끈적한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네 사람의 허물은 벗겨졌고, 모두 조금 덜 조심스럽고 조금 더 뻔뻔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는 그다지 볼 것 없는 한 개인이 누군가의 자식이 될 때 그는 아주 대단한 인물로 그려진다. 나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는 자기 자식들의 못난 모습은 차마 보지 못하고 조금이나마 밝은 부분을 크게 들춰내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어릴 적부터 우리 딸이 얼마나 똑똑했냐면요, 혹은, 우리 아들이 지금쯤 수학 교사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건데, 식이였다. 자식들에 대한 집착과 애착에 있어 비슷한 액션을 취했던 두 사람이 쥐고 있는 삶의 끄나풀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내 어머니의 고질병은 어딜 가나 돈 얘기를 쉬지 못하는 데에 있다. 정말 돈값을 하더라고요. 그건 너무 비싸잖아요. 손해 안 보고 샀어요. 그건 얼마 정도 주셨어요? 등등등, 엄마의 하루를 비디오로 찍어서 값에 대한 그녀의 언급이 몇 번이었나를 세어본다면 아마 하루의 반나절은 돈에 대한 언급일만큼 심각한 수준으로 엄마는 삶에 값을 매기길 좋아한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돈 대신 미신을 강력하게 믿으신다. 어머니의 세상에 대한 의견의 뿌리는 사주거나 점집 할머니가 해준 얘기들이었다.

 한 번 들었을 때만 재밌을 얘기들을 두세 번, 네다섯 번, 그것을 넘어서 끊임없이 반복해 듣게 되면 재미는 물론 경외심 따위는 내 주변 5미터를 훌쩍 넘어 도망가버리고 없다. 아른가리는 빛도 없다. 4박 5일 동안 온종일 두 중년 여성과 함께 하는 와중에 내게는 그들에 대한 존중을 회복할만한 쉼이 없었고 그들을 향한 내 시선은 점차 차가워져 갔다.

 지루한 눈의 남자 친구가 두 어머니들의 잔치 같은 말들 앞에서 고등어회를 집어 먹을 때, 나는 남의 어머니를 멈출 수는 없어서 내 어머니를 향해 잔소리를 하고 무안을 줬다. 나의 위아래를 모르는, 싹수없는 인격이 드러나는 동안에 남자 친구는 매사에 심드렁하기 좋아하는 감정의 게으름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 넷은 제각기 별로였다.  

 


 다음날 아침


  한라산 영실 등산로를 다 오르지 못하고 정방 바위에서 되돌아온 다음 날부터 두 어머니의 체력은 급격하게 고갈됐다. 그의 어머니는 어딜 가든 앉을자리부터 찾으셨다. 그리하여 제주도에 간 우리는 카페에 늘어앉아 몇 시간이고 보내게 되었다. 그 시간에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한낮의 우리 네 사람뿐인 카페에서 다시 말이 시작되었고 네 사람은 무슨 말이든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은 꼭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아들은 하나쯤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영이 네가 애를 낳으면 내가 좀 보다가 너희 어머니가 또 좀 봐주면 되니까.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삼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저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요. 아직 하고 싶은 게 넘쳐나요.

 요즘은 결혼하고 자식 낳아도 자유롭게 살 수 있어. 애 낳고 우리가 봐주면 되지.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말이 안 되죠. 어머니들은 이제 어머니 개인의 인생을 살아야죠. 어머니 개인의 삶이 너무 없었잖아요. 그 자리에 남편의 무엇이 끼여있거나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들의 삶, 자식의 자식들의 삶이 끼어들고, 그걸 내 인생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내 자리에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들어서는 게 기본값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내 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세워놓고 그게 나를 드러낸다고 믿는 것 같아요. 어머니들 카톡 프로필만 봐도 그래요. 내 사진이 아니라 내 자식들 사진으로 가득 차 있잖아요. (게다가 아들은 하나쯤 꼭 있어야 한다니 너무 하시네요, 라는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가족이 없으면 너무 외로워.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그건 외롭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내 삶의 주인이 되어보려고 애쓰는 문제죠. 또 어떤 외로움은 짊어져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해요. 나이가 들어도 무엇이든 배워야 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호기심을 잃으면 안돼요. 배우면서 내 자리를 내가 지켜야 해요. 자제할 줄 모르는 내가 몇 마디 말을 더 했을 때 두 어머니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남자 친구는 나를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 네가 공부하라고 할 때 제일 듣기 싫더라. 내 엄마가 말했고 그제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어쩔 때 참을 수 있었고 어쩔 때 참지 못하고 무슨 말을 했다. 여행이 끝난 지금 여행 일지를 쓰고 있는 와중에 후회가 밀려드는 말들이었다. 후회해봤자, 다시 돌아가 봤자, 나처럼 오만한 성정의 사람은 오만을 부렸을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돌아온 집에서 깊은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생리를 시작했다. 피를 보고 나니 안도감이 들었다. 내 인생에 임신은 없을 거라는 안도감과 여행이 끝났다는 안도감.


 한라산 정방 바위에는 500명의 자식을 낳고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하다가 가마솥에 빠져 죽은 맹을 기리는 전설이 있다. 이 잔인하고 무섭고 억울하고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모성에 대한 귀감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겁난다.

 어머니들을 위한 여행이었는데, 어머니들이 위한 것은 자기 자신들이 아녔음을 확인했던 여행으로 끝났다. 엄마 삶의 알맹이가, 그들이 꼭 쥐고 있어야 할 그것이 그들 손에 없었다. 나의 엄마나 그의 엄마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마솥에 빠져 죽을 시늉이라도 할 것 같다. 그러면 나나 그도 500번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를 위한 바위를 세워야 하나.


 남자 친구 어머니의 꿈은 여군이었다.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다 아이가 들어섰고 낳지 않을 수 없어서 아이를 하나, 둘, 셋을 낳다가 어머니로 한평생 살게 되었다. 첫째 아이가 들어섰을 때 삶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갈 생각도 해봤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고, 막내 아이를 지우려고 찾아간 곳에서는 끔찍한 기계 소리에 놀라 아이를 지우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다고 말씀하셨다. 시어른들을 모셨고, 일곱 명의 빨래를 등에 업고 강터에 나가서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리고, 농사일도 떠 맞는, 겹겹의 노동을 하셨다. 이제야 허리를 좀 펼 수 있을 것 같은데 몸 여기저기가 아프시다.

그녀에겐 그녀의 이야기가 있고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듣게 된다. 나와 다른 시절에 태어난 나보다 오랜 한 여성의 삶이란 그랬구나, 내가 감히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겠구나.


 그러나 그녀가 그의 어머니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를 마주하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향한 경외심은 달아나 버린다. 우리가 서로를 같은 여성으로 바라 불 수 있을 때 빛날 나의 시선이 한국 문화 아래 예비 시어머니-며느리로밖에는 서로를 쳐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냉담하고 차갑게 식는다. 내겐 그녀의 요구가 너무 벅차고 나는 그녀가 내게 바라는 것을 내어줄 수 없다. 그의 어머니는 본인이 전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내게 어머니가 되라고 말했다. 거기에 어떤 좋음이 있을까. 무엇보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좋을 수 있을까.  


나는 그냥 내 딸이 원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어. 내가 결혼을 하고 맘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내 딸이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어.

 딸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남자 친구의 질문에 우리 엄마가 대답했다.


 나도 우리 엄마가, 그리고 그의 엄마가 이제는 원하는 것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뭘까. 자식들의 행복과 건강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엄마들은 위대한 모성으로도 만 살다 가면 족할까.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고 엄마가 아닌 시간들에서 그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볼까.


말하는 인간과 물질하는 인간


 서귀포시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의 2층에는 제주도에 사는 현대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이명복 작가의 제주도 여신들에 대한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다. 제주도를 말할 때 4.3 사건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4.3 사건 이후 많은 남성들이 학살당했을 때 여성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질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실제로 제주도 바다를 마주할 때마다 물질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은 우리가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몇 시간 동안, 우리가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물질을 했다.

 물질하는 해녀 삼촌, 감자를 캐는 삼촌, 추운 겨울 거리에서 호미를 들고 선 삼촌들을 담은 이명복의 그림은 따뜻하고 슬펐다. 일하는 여성들의 아우라는 사람 냄새가 가득하고 씩씩했는데 나는 왠지 울컥하고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했고 쉬는 날이 드물었다. 아빠가 게으름을 피울 때도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게 셔터문을 열었다. 지금에 와서야 여유가 생겨서 사장님 행세를 하며 가게 문을 마음대로 열고 닫지만, 이런 시간이 오기까지 그녀 삶은 길고 긴 노동이었고 함부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남자 친구 어머니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남편이 일을 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해도 그녀는 먹여 살려야 할 식솔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뭐라도, 하물며 풀을 베는 일이라도 손을 번쩍 들고 참여했다고 한다.    


 옳은 말이라도 하지 말하야할 때가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때를 가리지 못하고 배려할 줄도 모르면서 아무런 따뜻함 없이 어머니들을 공격했다. 내 말은 나를 위한 말이었지 그들을 위한 말이 아녔으므로 전혀 가치가 없었다. 내 말은 그저 하나로 해석되면 된다. 나에게서 당신의 행복을 찾지 마세요. 나는 당신의 눈길이 부담스러워요. 그게 다였다. 뭐가 옳은지는 모른다. 시대가 변했고 우리는 각자의 시대에서 옳은 생각을 하는 다른 세대의 인간들로 나뉠 수밖에 없을까.


  나는 말 뿐이고 두 분은 삶을 살아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시작하여 나는 상상도 못 할 일, 생명을 길러내는 일을 해냈다. 한 줄로 요약하기에 너무 많은 눈물이 울고, 근육이 달아버려서 장기가 늙어가야 했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경외심을 잃고 그들의 역사를 무시한 채 내 잘난 생각들을 떠든 게 몹시 후회스럽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 어머니들에게 마이크를 내어줄까.


 우리들의 여행은 내가 그렸던 자유 여행은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어머니 두 분을 마냥 즐겁게 해 드리는 효도 여행도 아닌, 미적지근한 여행으로 끝났다. 부풀었던 마음은 납작하게 꼬여서 돌아왔다. 한 가지 건진 것도 있다. 나는 내 글이 항상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나를 드러내는 데에 급급하게 되면 내가 쓰는 글들도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 내 시선과 마음을 상대를 비추는데 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상대의 역사를 들여다보겠다는 다짐이다. 일말의 애정을 느끼는 타인들에 대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감탄과 경외를 멈출 때 글의 생명력도 끝날 것이다.

 누군가의 표면을 훑고 비난하는 일은 쉽다. 보이는 족족 촌스럽다고 말해주면 된다. 그러나 그 삶의 역사를 전해 듣게 되었을 때,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에 이유가 있음을 한 발짝 물러서서 곱씹어볼 때는 비난하는 나를 비난하고 싶어질 때가 생긴다.

 말은 쉽고 살아내는 일은 어렵다. 너무 잘나서 체면이 가득한 잘난 소리를 지껄이는 일은 쉽고, 물질을 하고 감자를 캐고 헌 옷을 수거하고 농사를 지어가며 자식들을 키워내는 일은, 삶을 살아내는 일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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