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Jun 12. 2021

동거 1

우리 부모님을 뵈러 가자

  나에게는 나이 듦에 대한 두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홀로 사막을 항해하는 나. 사막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때때로 모래 바람이 불어올 만큼 거칠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두 발이 모래알 사이로 푹푹 꺼지지만 나는 용감하고 자유롭게 걸어 나간다.

 아직은 젊어서 무릎이 아픈 게 뭔지 모를 때나 가능한 순진한 상상이라는 걸 인정한다. 늙음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들고 늙은 나는 최대한 고생스러움을 피해 안락함을 사고 싶을 것이다.


 다른 이미지 속 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다. 그와 손을 잡고 조용한 흙길을 걷고 있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여자는 권력자를 심하게 욕하며 상스러운 말을 내뱉더니 꽃이 아름답다고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는 귀가 먹었는지 한 참 뜸을 들이다가 여자의 보채는 목소리에 아름답다 는 대답을 사긋하게 한다.

그는 누굴까?  


 나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고 우리는 8년째 동거 중이다. 그렇다면 내가 마주할 노후는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클까. 아직은 '결혼'이라는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므로 전자의 탐험가가 될 가능성이 더 클까. 할아버지는 과연 내 옆에 이 남자일까.

 

 알 수 없다. 날이 더워지는 와중에 좁은 원룸에서 온종일 똑같은 사람과 몇 달을 내리 살아보니 알 수 없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탐험가 쪽을 택하고 싶다.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던 중에 그가 며칠 집을 비우겠다고 말했다. 바라던 바다. 나는 그에게 부디 일주일쯤 푹 쉬다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은 너무 느리게 흘렀고,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때 나는 그를 얼싸안았다. 그의 티셔츠에서 나는 쉰내도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 그가 반가웠다. 네가 없으니까 못 살겠다는 투정 어린 말까지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를 자제했다.


 내가 원하는 게 뭘까. 혼자가 되는 것과 둘이 되는 것 사이에서 내가 정말로 기대하는 삶은 어떤 모양인가. 나는 오래도록 이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거나 결혼을 하거나. 씩씩한 개인이 되는 것과 다른 사람과 내 삶을 나눠가지는 것이 서로 상보적일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나는 동거를 주장할 것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를 제일의 가치로 삼는 동거를 주장할 테다. 짬뽕과 짜장면을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소비자들을 위해 짬짜면이 상품화된 것처럼 혼자와 함께를 동시에 누리고 싶은 나 같은 인간들을 위해서 '자유가 전제한' 동거는 꽤 괜찮은 옵션이다. 문제는 따로 있다. 태초부터 '자유'가 부재한 교육 환경에서 자라난 인간 두 명이 만났을 때 무엇이 자유인지 제대로 정의 내리는 일이 꽤 어렵다는 사실과 네 자유가 내 자유를 침범했다고 막무가내로 싸우는 일이 빈번하다는 현실에 부딪힌다. 그의 날고 싶음을 응원해주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의 앞을 흐리고 욕망을 무화시키는 것이 소유욕 강한 인간들에겐 더 유혹적이다. 공장식 교육을 받은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그래 왔던 대로 별다른 의문 없이 정해진 절차를 따라 결혼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는 답이 없을까. 결혼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도착지라고 믿으면서?  


 [사례 1/ 우리 부모님을 뵈러 가자]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같이 보고 있던 넷플릭스를 일시 정지했다. 되돌아온 그에게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가 끝났을 때 그가 내게 이번 주말에 자기 집에 다녀오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너는 내가 요구하지 않는데도 굳이 우리 부모님을 너무 찾아뵙고 싶을 것 같아? 우리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그들이 원한다면! 그가 말했다.

-그들이 원하고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가 물었다.

-응, 그들이 너무 원하면 찾아뵐 수 있는 거 아냐? 그가 말했다.

 모종의 압박감을 심어주는 불편한 대답이었다. 다시 일주일 정도 그가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말이 왔고 그는 자기 부모님 댁에 갔다. 나는 내 집에 남았다.


 내 안에 길들여진 요정은 이렇게 속삭였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가족 모임에 한 번 참석해줄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했니?

 내 안의 크루엘라(여자 악마)가 반박했다. 솔직해져. 중요한 건 네가 가고 싶은지 가고 싶지 않은지 아는 일이야. 사회적인 예절? 그게 뭔데 도대체? 남자 친구 말을 잘 들어주는 여자 친구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역할이야?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기를 위해 한번쯤 눈감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남자 친구를 너는 계속 만날 수 있니?

 나는 언제나 크루엘라 쪽이 좋다. 힘이 닿는 한 크루엘라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 나는 요정을 쫓아내고 크루엘라에게 마이크를 쥐여줬다. 자유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에 있다고, 크루엘라가 내게 속삭였기 때문이다.

 

 차가 없는 내가 광주에서 대구까지 버스를 갈아타며 내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 데에는 편도 4시간이 소요된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다시 광주로 돌아오고 나면 온전한 내 시간에 대한 갈망이 커져 있다. 내가 만약 충분히 사회적인 인간이라 그의 가족들을 방문하는 일로부터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겠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될 때에만 심신의 안정을 느끼는 사람이고 내 부모님을 마주하는 일에도 때때로 심한 심리적 피로에 짓눌리고 만다.

 

 이런 나라서, 나는 남자 친구에게 우리 부모님을 뵈러 가자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가 우리 부모님이 뵙고 싶고, 그립고, 보고 싶다면 내게 먼저 제안할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가 먼저 대구에 한 번 다녀오자고 요청했던 것은 나를 자기 부모님 댁에 데려가기 위한 구실 마련이었지 우리 부모님이 보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도 알고 나도 안다. 그에게 불만이 없는 이유는, 내가 꿈꾸는 이미지에 우리 두 사람이 나란히 손을 잡고 산책하는 장면은 있을지라도 그가 우리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까지는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오 년 만의 신혼여행'이라는 수필집에서 저자 장강명이 이미 한 말이다. 그는 어머니랑 와이프가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한 번도 생각되지 않아서 두 사람이 만날 일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가의 생각이 신선했고 반가웠다. 내 주변에는 온통 길들여진 요정들 뿐이라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마침내 내 안의 크루엘라가 친구의 음성을 들은 듯 기뻐했었다.)


 내 부모님은 남자 친구가 보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한 번 보자고 요구하지 않는다. 엄마는 남자 친구를 좋아하고, 아빠는 아직 한 번도 그를 만나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그를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 할 만한데도 한 번 데려오라느니, 언제 시간이 되냐는 식으로 묻지 않는다. 남자 친구와 관련하여 엄마가 하는 언급은 영학이 파김치를 좋아하면 좀 가져가라는 말 뿐이다. 언젠가 남자 친구가 운전해서 대구를 방문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운전 때문에 그가 피곤할 거라며 오지 말라고 말했다.

 남자 친구네 가족들은 좋은 분들이고 내게 친절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게 아닐 테다. 내 엄마가 언제까지고 조심스러울 때 그의 가족들은 나의 방문을 보다 쉽게 요구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딸의 부모가 딸의 남자 친구를 쉽게 호출하지 않을 때 아들의 부모가 아들의 여자 친구를 당연하게 호출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부모들의 성향 차이일까.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남자 친구의 입맛에 맞춰 어색하지 않게 그의 가족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자 친구가 될 때에만 그도 나에게 별 불만이 없을까.


 나는 점점 더 궁지로 몰리는 느낌이다. (내가 요구하지 않은) 애정과 챙김을 받고도 그들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나를 비정하다고 차마 말은 못 하고 눈썹을 치켜드는 남자 친구를 상대하자니 말이다. 크루엘라는 크루엘라네 가족 문제로만으도 버겁고, 대구와 광주를 오가는 일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충분히 바쁜데, 남자 친구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우리 누나가 너 보고 싶다고 하던데, 그것도 불편하다고 말할 거니?

 친구의 불평이 생각났다. 친구의 남자 친구는 자기 부모님 댁에 정기적으로 자기 여자 친구를 데려가고 싶어 했는데, 그게 불편했던 친구가 싫다고 의사 표현을 한 번 하자, 나이 든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냐면서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화를 냈다고 했다. 정녕 불쌍한 사람은 그런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는 너라고 다름 아닌 내가 친구에게 말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결혼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내가 저항하고 싶은 것이 '결혼'이라는 완벽한 로맨스에 대한 믿음에의 반감인지 '결혼' 후에 마주해야 하는 가족 문제의 피로감에 대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동거가 결혼으로의 귀결을 피한 채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내가 확신하고 싶은 것은 치사하고 교묘한 이유를 들고서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그에게 강요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서로의 자유를 위하는 동거 생활이 언제나 조화로운 모양을 띨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의 완벽함이 아니라 내가 지향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자유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하여 나는 사막의 탐험가가 되는 일과 누군가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일을 번갈아 맛볼 수 있는 크루엘라로 남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른다. 탐험가가 되는 일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사랑을 나누는 일은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라 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파편화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