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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n 05. 2021

파편화된

 1. 선생님

 학원 일을 그만뒀다. '선생님'하고 꼬박꼬박 불러주는 아이들 앞에 고개가 숙여져서 그만둔 건 아니다. 돈이 안돼서 그만뒀다.


 열 군데 학원 면접을 보러 다닌 끝에 선택한 곳이었다.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최저 시급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곳, 출근 시간 1시간 전에 미리 와서 수업 준비를 요구하는 학원, 10시부터 7시까지 수업인데 식사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원장, 1년 이상 근무를 약속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조건, 일주일에 1번 있는 무급 회의 시간에 무조건 참여하라는 당연한 요구, 학부모에게 돌리는 전화가 수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원장과 내 개인 이력을 두고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꾸짖는 원장까지, 가지각색의 뻔뻔함과 치사함들이 그들의 입 속에서 흘러나왔다. 면접을 보는 일만으로도 지쳤다.
 

 그러던 중에 고양이 세 마리가 나를 반기는 학원에 들어섰다. 어쩌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원장 선생님은 내가 비건인 것까지 이해해주셨다. 주문해서 먹는 도시락을 같이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따로 식사 비용을 지불하겠다고도 말했다. 생일이라고 월급에 3만 원을 얹어 보내시고 학생 수가 한 명 늘어나면 머릿수에 따라 1만 원씩 더 보내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주는 돈을 거부하진 못했다.

 
 첫인상과 실제는 조금씩 달라졌다. 수업에는 정해진 규율이라는 게 없었다. 하루는 원장이 내게 프리토킹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니 다른 하루는 철저한 시험 대비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게시판을 미국 학교식으로 자유롭게 꾸며보라고도 했다. 교재를 함께 고르러 가자고 말했고 밤 10시에 시작하는 회식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원장은 내가 학원 '식구'가 되길 기대했던 것 같고, 나는 주에 11시간을 일하고 월에 55만 원을 받는, 그 외의 시간을 오직 나를 위해서 잘 쓰고 싶은 노동자로 남고 싶었다. 이것은 단지 입장 차이일까. 원장이 과도한 업무를 요구하는 것일까, 나의 열성적이지 않은 업무 태도가 잘못일까.  

 중간고사가 끝나자 아이들 몇몇이 학원을 그만뒀다. 이후로 원장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다급히 회의를 요청했다. 어느 토요일, 나는 책임전가의 회의 현장에 참여해야 했다. 그것은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졌는데, 물론 무임금 회의였고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선생들은 원장의 은근슬쩍한 명령에 무임금 청소도 해야 했다. 아이들의 시험지를 앞에 두고 원장은 말했다.

 '선생님들이 느껴셔야 해요. 뭐가 문젠지.' 죄지은 사람처럼 네 명의 여선생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 시험이 망하면 학원 선생님들이 벌을 받게 되는구나.

 '이번에 제가 민성이 어머니한테 약속했어요. 기말에는 반드시 민성이 성적 다시 올려놓겠다고.' 나는 깨달았다. 선생님들은 반드시 성적을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해야 있구나.

 그날 나는 다른 세 분 선생님들의 완벽한 시험지 분석 그래프를 앞에 두고 시험지를 제대로 분석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핀잔을 들었다. 원장 본인은 아무런 준비도 해오지 않았으면서, 최저시급보다 몇천 원 더 받는 고용인들이 임금을 지불받지도 못할 시간을 내어 문제를 분석하고 분석 그래프까지 만들어오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줄 몰랐다. 나는 그의 훈계를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러 보내려고 애쓰면서 멍 때렸다. 밖을 보니 빗줄기가 떨어졌다.

 '선생님, 회의가 언제 끝날까요? 비가 올 것 같은데 자전거를 타고 왔거든요.'라고 내가 말했을 때 원장은 택시비를 줄 테니 택시를 타고 가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원장의 발언은 선생들이 담당 학생들을 정해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시간에 임금은 주실 건가요?'라고 내가 물었을 때 원장은 정 그러면 수업 시간에 다녀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직장 생활이란 게 이런 건가. 책임은 계속해서 커지고 주어진 업무는 책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임금은 최저 시급을 웃도는데 고분고분 따라야 하는?
 

  마침내 회의가 끝나서 자전거에 올라탔을 때 굵은 빗방울이 두둑두둑 떨어졌다. 자전거 페달을 밝아가며 내 머릿속에 차오른 분노는 대충 이러했다.

-원장은 원할 때마다 회의를 주최할 수 있고 회의 시간은 제한이 없다. 회의 시간은 철저하게 그의 학원을 위한 시간인데 원장은 무슨 권리로 선생님들에게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무임금 회의를 요구할 수 있는가.   

-원장은 아이들 교재를 같이 사러 가자고 말하면서 점심은 자기가 사겠으니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는 '통 큰' 요구를 한다. 나는 점심을 얻어먹고 싶지도 않고 교재 준비는 원장이 세팅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떻게 부탁이 아닌 '가야 한다'는 당위를 내세울 수 있나.

-시험을 대비해서 단어장과 작문 지를 만드는 데에는 대략 1시간 반이 걸린다. 그 시간들을 두고 불만이 터지자 원장은 그것이 선생들의 당연한 (무임금) 임무라고 선을 그었다. 수많은 학원에서 시간제가 아닌 월급제를 선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다. 언제나 얼마쯤의 착취는 당연한 책임감으로 포장 가능하니까!
   

 고작 55만 원이라고 말하기에는 돈을 벌어야 해서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맥주를 한 캔 들이켠 이후에도, 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홧김에 그만두겠다고 말하게 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수업 중이던 선생들을 원장이 불렀다. '선생님들, 제가 요즘 힘들어요. 그래서 그런데, 이제 아이들이 학원을 그만두게 되면 만원을 플러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월급에서 마이너스하는 걸 생각하고 있어요.'  

미친 거 아니냐는 되물음이 턱까지 올라왔더랬다. '원장 선생님, 저는 학원생이 늘어나서 받는 만원을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는 걸요. 그건 선생님이 원해서 주신 거잖아요.'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고 원장은 자기의 힘듦을 연이어 말했다. 다른 선생들은 침묵을 지켰고,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실망감에 빠진 나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2. '산재는 왜 반복될까 (시사 인(호수 717) 전혜원 기자의 기사)'를 읽고


  승민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고 우리는 파닉스를 같이 공부했다. 학원 마지막 수업 중에 승민이에게 물었다.

- 승민아 너는 나중에 뭐하고 싶어?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어른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 내에서 일하고 싶어요.

- 왜?

- 실내에서 일해야지 편하고 안전하니까요.

 
 한국의 산업 재해 사망률은 OECD 1위고, 이 수치는 지난 5년간 한 번도 5위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일상을 사는 우리는(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일까) 산업 재해에 대해서 무지하다. 산업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2020년에 882명이 산재사고로 사망했다/고용노동부 잠정 집계)

 책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의 저자, 허태준 씨의 말처럼 사무직의 어려움을 다룬 이야기가 넘쳐날 때 '세상에 공장이란 곳이 있는지 모르는, 실제로 그 감각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사람들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곳은 나와 내 아이들이 속해서는 안 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편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곳이기 때문에.

 
 쿠팡에서 일하는 물류 센터 노동자들이 과도한 업무에 짓눌려 죽어나가는 와중에 나는 쿠팡에서 두유와 오츠를 시켜 먹는다. 일말의 죄책감이면 충분하다고 나를 달래면서 아침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평택항에서 이선호 씨가 죽었을 땐 눈과 귀를 열지 못했으면서 포털 사이트에서 쏟아지는 의대생의 죽음을 다룬 기사에 마우스 커서를 갖다 댔다.  


 중대재해 처벌법이 통과된 이후에 안전관리자를 선임할 의무가 없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외려 노동자들의(특히 하청 업체 노동자들) 업무 부담이 늘었다고 한다. 사업장들이 안전관리자나 작업 지휘자를 따로 둬야 하는 법적 제재가 없고, 강화된 안전규정 아래에서 해야 할 일들은 말단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산재 예방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악용되는 사례도 있다. 사고가 나서 산재 처리를 하면 산재보험료가 오르기 때문에 실제로 사고가 났을 때 사장들은 119를 부르지 않고 노동자들은 회사 봉고차에 실려 병원에 간다. 산업 현장은 공장 노동자들의 안전을 방치하고 노동자 보호를 위해 만들었다는 법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더한 업무와 소외를 부과한다.
 노조는 무얼 하나. 노조는 하청 업체 노동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원청과 하청업체 사이의 위계적 구분은 뚜렷하고, 차별은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노조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시 노조 안에서의 가장 윗세력들의 안위를 위해서이지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아닌 듯하다.
 '요즘 공정 담론이 많이 나오는데, 공정이란 단어는 늘 대기업이나 공기업 직원, 공무원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룰에만 쓰여요.... 사실 공정은 좀 더 다양하게 써야 하는 개념 아닌가요? 그냥 양복 입은 사람들하고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누구 하나 주눅 들지 않고 같이 출퇴근하면서 서로 존중해주는 거 이거면 되는데.' 천현우 씨의 말이 메아리처럼 내 귀에 울린다.


 승민이는 실내에서 일하는 어른이 되고 싶고, 나는 학원의 불공정함을 외치면서 과외 일을 구할 생각이고, 공정은 다시 가진 자들을 위해서 쓰인다.


3. 파편화된
 에릭 올린 화이트는 <21세기 반자본주의자로 살아가는 안내서>라는 책에서 '파편화된 계급 구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한 때 세계의 계급을 1 퍼센트와 99 퍼센트로 바라보는 책이 인기를 끌었는데, 현실 세계의 99 퍼센트란 한 뭉텅이라기보다는 자잘하게 파편화된 계급 구조이다. 우리는 노동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아래의 노동자보다는(바깥에서 일하는 육체 노동자) 좀 더 위의 노동자(사무실에서 양복 입고 일하는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하고, 좀 더 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또 급이 나뉜다.  

 경쟁하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개개인들의 삶은 더 사유화되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들을 위한 응집력은 흩어지고 사라진다. 내 이해관계는 내 문제에 갇힐 뿐 확장되길 거부한다. 그리하여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평등/공정과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나의 평등과 자유일 뿐 우리의 평등과 자유는 결코 되지 못한다. 연대는 없고 경쟁하는 개개인들이 남는다. 게임에서 이긴 A는 B보다, B는 C보다, C는 D보다, 그렇게 계속 더 나은 물건들을 사고 옷을 걸치고 공간을 점령하고 결국 문화를 점령한다.


 길고 길었던 회의의 틈을 타서 선생님들에게 이건 아니지 않냐며 동조를 구했다. '선생님이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겠는데, 그래도 여긴 다른 곳에 비하면 나은 편이에요. 노력한 만큼 나중에 원장 샘이 챙겨주긴 하세요.' 동료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액션은 없었다.

  

 돌아온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내 개인의 위치를 감각할 뿐 아니라, 마땅해야 할 가치들을 바로 앞에 두고 한국 사회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도 확인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 지치고 피곤해서 모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에릭 올린 화이트는 파편화된 개인들이 연대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치의 공유를 주장했다. 같은 계급끼리 묶이는 일은 불가능해졌지만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 끼지 함께하는 일은 아직 가능하니까.   

 나도 동지를 찾고 싶다. 나처럼 치사하고 모순적인 동지라도 좋다. '부자가 부자인 이유가 어느 정도 빈자가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착취 구조의 핵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개개인들이 적극적이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수단에 대한 동등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내 자유가 중요한 만큼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혼자서는 세상과 세상의 모순들이 너무 크고 무섭고 버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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