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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May 21. 2021

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 몸이 내 것 같지가 않다고!'  30년 동안 숨겨온 성적 정체성을 고백하면서 로렌스(영화 <로렌스 애니웨이>)가 한 말이다. 나는 그와는 다른 이유로 서른 살 먹도록 내 몸과 불화해왔다. 

 로렌스가 되고 싶었던 건 여성이였고, 내가 꿈꿨던 건 날씬해서 아름다운 여자였다. 골반과 허벅지에 붙은 두툼한 살들을 견딜 수 없었다. 내 살이 내 몫 같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대한 내적 갈등은 내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결정지었다. 몸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을 벅차게 만들었다.   


<1막>

 어렸을 때부터 통통했다. 최초의 다이어트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시작됐다. 한 달에 8킬로를 빼고 학교에 나타났을 때 경민이가(내가 좋아했던 남자아이) 건네준 보석 사탕 반지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아이의 부끄러운 듯한 시선과 '너 정말 예뻐졌다.'하고 내 귀를 건들이던 서울 말씨는 사탕보다 더 달콤했다. 에어로빅 모닝반 아줌마들과 함께 흘렸던 땀방울들과 눈 앞에 두고도 침을 삼키며 참아야 했던 밥알들에 대한 보상이였다.

 금방 뺀 살은 금방 돌아왔고 경민이는 전학을 갔다. 경민이의 전학은 요요가 찾아온 시기와 맞아 떨어져서 그가 다시 뚱뚱해진 나를 보고 싶지 않아 전학간 것만 같았다. 이후로 내 다이어트는 무한 루프에 빠졌다. 굶어서 살을 빼고, 앙갚음을 하듯 폭식해서 살을 찌우는 악순환이 서른 살이 먹도록 계속될 줄 그 땐 몰랐다.
 

 초등학교 4학년 짜리 여자아이를 혹독한 다이어트의 세계로 몰아붙인 기제는 뭘까.


-가영이는 살만 빼면 정말 예쁠 건데.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친구들, 심지어 엄마 아빠도 '살만 빼면' 정말 예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작고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입모아 하는 말을 진실이라고 믿었다. 살찐 내 몸이 부끄러웠고,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말 예쁜 아이가 되어 인정받고 싶었다.


-살만 빼면! 

 마법의 주문일 줄 알았다.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처럼 살빼는 일에 집중했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살은 더 쪘다.

 '예쁜 돼지' 로 불렸다. 친하게 지내던 남자 아이들이 선심쓰듯 그렇게 불렀다. 돼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예쁜'이라는 형용사에 위안을 받아야 한다고 나를 달랬다. 내겐 부푼 몸 말고 많은 것이 없었는데, 가장 없었던 건 돼지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구할 용기였다.
 연극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간 학원에서도 살을 좀 빼오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학원 원장이 목표 몸무게를 정해줬다. 새 모이 양의 닭가슴살을 쪼아먹고 아메리카노를 입에 달고 사는 생활을 다시 불러들였지만, 4자를 달고 오라는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오랜 굵음은 머리카락을 앗아갔고 폭식증을 남겼다. 음식을 많이 먹은 날에는 학원에 가지 않았는데, 그런 날이 점점 많아졌다. 몇 달간사람 대신 음식과 조우하면서 집에서 숨어지내는 지경까지 치달았다. 거울 보기가 무서워 불을 끄고 살다가, 다시 시작해보자고 마음 먹고 방문을 나섰을 때의 몸무게가 80킬로그램이였다.
 지금 남자친구가 그냥 친구였을 때 이따금 그는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살빼고 나면 오빠한테 와라.ㅋㅋㅋ'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던 내게 다시금 붙는 '살을 빼면'이라는 조건은 진공상태로 압축하듯 내 심장을 쪼그라트렸다. 아팠다. 그에겐 웃긴 농담 한마디가 나라는 존재를 쪼그라트렸다.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먼저 자신을(몸을) 부정해야 하는 괴로움을 체화해왔다. 뚱뚱한 내가 미래의 날씬한 그녀가 되기 위해서는 음식과 불화해야 했다. 다른 방법을 몰랐다. 

 살아 있는 것이 허기를 느끼는 건 당연해서 참고 참았던 허기는 예고 없는 파도처럼 고개를 쳐들고 나를 덮쳤다. 그런 날에는 어른들도 소화하기 힘든 양의 음식을 먹어 치웠다. 굶으면서 몸을 혹사했고, 허기증을 견딜 수 없을 때에 다다라 자제력을 잃은 폭식으로 자학했다. 내 입이 음식을 원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혀가 음식을 끌어당기고 이가 그것을 씹어 목줄기로 넘기면서 느꼈던 불안과 수치심을 털어놓을 데가 없었다. 배고픔을 느낄 때마다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고 내가 먹은 음식이 나를 얼마나 부풀릴지 걱정하는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비대해지는 몸과 줄어드는 자아의 간극을 음식으로 채우는 일은 도돌이표를 달고 일상적으로 나를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몸이 건네는 배고픔과 배부름의 신호를 분별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몸이 말하는 신호를 무시하고 내가 믿는 규율로 몸을 억압한 대가였으리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음식을 도피처로 삼았다. 예쁜 나를 위해서 음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동시에 좌절된 내가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도 음식이였다. 먹을 수도 없고 먹지 않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혼란 속에 갇혀 버렸다. 살만 빼면 정말 예쁠 거라는 말은 마법이 아닌 저주였던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왔다.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면 누구한테 해야 할까.


<2막> 

스물에서 서른이 되는 동안 내게 일어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몸에 있다. 다이어트를 그만두자 살이 빠졌다. 나만큼 굵은 허벅지를 가진 언니들이 핫팬츠를 입고 엉덩이를 씰룩거려도 눈길의 대상이 되지 않는 문화에 놓였고, 비건이 된 이후로 외식보다 직접 요리해먹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다이어트를 위한 연례 행사였던 운동은 체력을 기르기 위한 일상이 되었다. 나를 뚱뚱하다고 부르는 사람들, 더 예쁜 모습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사라졌고, 날씬해서 예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코르셋은 헐렁해졌다. 저주에서 벗어난 건가?


 내가 변하는 동안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도 변해 왔다. 말라서 예쁜 여자는 퇴물이 되었고 빵빵하게 예쁜 여자가 대세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도 다른 저주로 옮겨탔을 뿐이다. 지방율을 줄이고 근육량을 늘이자는 슬로건이 새 시대의 아름다움으로 반짝였다. 운동 인플루언서들의 탄탄한 복근과 업된 엉덩이는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건강하기 위해 시작했던 운동이 슬그머니 몸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갔다. 지방을 걷어내고 근육으로 몸을 채우는 일에 집착하는 여자가 내 안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녀는 내 허벅지의 지방 덩어리를 가르키며 아직 만족할 때가 아니라고 채근했다. 그녀는 조금만 더 탄탄해보자며 나쁜 음식과 클린 푸드를 나누었고 엄격하고 깨끗한 식단을 따르길 종용했다.

 '조금만 더'는 '살만 빼면'만큼이나 끔찍한 조건이였다. 점점 좁아드는 시야의 끝에서 내 눈 앞에 놓여 있었던 건 늘어난 운동 시간과 깨끗한 음식들 뿐이였다. 운동을 빼먹은 날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나쁜 음식을 탐한 날에는 가책을 느꼈다. 몸이 얼마나 건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황폐해진 건 틀림없었다. 변한 내 몸을 보고 사람들이 칭찬을 건넬 때마다 나는 그것을 더욱 모질게 질타했다. 복근은 충분히 선명하지 않았고 엉덩이는 여전히 내리막이였기 때문이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인정해주기 위해서 갈 길이 멀어보였다. 하루하루가 쫓는 일과 되돌아오는 좌절의 되풀이였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폭식증이 튀어나왔다. 불안은 습관처럼 음식을 찾았고, 운동과 식단에 질려버린 나는 정신줄을 놓고 과자부터 탐닉했다. 어쩌다가 다시 이 지옥에 왔을까.
 

 내 안에서 시작된 속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겁났다. 스스로 인정해줄 수가 없었다.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여자의 아름다움은 건강함에서 온다고 말하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압박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이름만 다를 뿐 또 다시 예쁜 여자가 되고 싶어서 기어다녔다. 기어서 가고 싶었던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나를 부추기는 욕망의 화살표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쏘아올린 사람을 쏴버리고 싶은데 말이다.


(커피 주문을 마친 두 여자가 거울 앞에 서서 몸을 비춘다. 45도쯤 허리를 비튼다. 자기는 어쩜 이렇게 슬림하냐고, 들어갈 때 들어가고 나올 때 나왔다고 서로를 칭찬한다. 셀카를 찍고, 확인하고, 지우고,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찍고 지우는 과정이 수차례 거듭되고 나서야 그녀들의 만족한 자아가 자리에 가서 앉는다.)


 우리 엄마가 가사 노동이라는 사회의 짐을 업고 살 때 나와 내 친구들은 '예쁘기'라는 사회의 요구를 짊어지고 산다. 엄마들이 그들 몫의 노동을 착한 양처럼 해낼 때 우리들은 우리 몫의 아름다울 의무를 뒤지지 않고 따른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아름답기로 한 것 뿐이라고 쿨하게 말한다. 한 사회 속에서 다수의 개인들에게 내면화된(internalized) 가치는 개인들의 본성으로 여겨지게 된다. 나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을 분리시키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다.
 

 캐롤라인 냅이 쓴 <세상은 왜 날씬한 여성을 원하는가>가 도착할 예정이다. 책 제목도 흥미롭지만, 저자 본인의 거식증 고백이 담겨 있다는 소개글 때문에 읽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아름다움에의 강요에 시달릴까. 아름답기 위하여 음식 앞에서 주저해보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
 

 친구 A양은 하루에 한끼를 먹는다. 배고프지 않냐고 물었다. '처음엔 정말 배고팠는데, 조금 더 참으니까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게 되더라. 이젠 별로 애쓰지 않아도 참아져.' 그녀가 원래부터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여자들은 배고픔에도 길들여질 수 있다.

 친구 B양은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 중이다. 체중계에 올라가는 일이 무서워서 미뤄오다가 최근에 6킬로가 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라도 해봐야한다고 말했다. 달리기를 끝낸 그녀에게 허용된 음식은 레몬 물 한 잔이다.

 친구 C양은 10년 동안 밥을 먹어본 적 없다. 탄수화물을 먹지 않으려고 애쓴다.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에너지를 다른 데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 D양은 다이어트 중에 참았던 디저트를 몰아 먹고 토를 한다. 위장이 상할 거라고 말하면 살찌는 것보다 낫다고 대답한다.

 다이어트는 여자들의 공공연한 대화 주제일 뿐만 아니라, 생활 신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마주한 많은 여자들은 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몸은 곧 나 자신인데, 더 나은 몸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여자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사회를 초월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 너머에 환대받을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없을 때 내가 속해 있는 곳을 벗어나는 게 가능한가? 미디어에서 광고하는 아름다운 몸들, 일상에서 만나는 몸에 대한 엄격한 시선들, 대상화된 여성성을 내면화하는 어쩔 수 없음이 한 데 모일 때 여자의 몸은 안팎으로 부정당한다. 부정이 만연해서 자연이 될 때 여자들은 자기 몸의 노예가 된다.     


 앞으로도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예쁘길 주문할 것이다. 깨끗하고 탱탱한 피부를 가지라거나 눈코입을 업그레이드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인정을 갈구하는 나는 다시 한 번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것이다. 예뻐지는 일에 집착하거나 운동에 게을러지면 불안하거나 불안이 쌓이다보면 폭식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걸려들 저주가 무엇이든, 그것은 여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형벌이다. 나의 몸을 부정하고 사회의 입맛에 맞는 몸으로 개량되길 바라는 충동은 외모 지상주의적 판단에서 기인한다. 예쁘지 않음을 집어내는 날카로운 시선과 예뻐지라는 은근한 압박과 예뻐져야 한다는 숨막히는 감시가 도처에 깔렸다. 이것들을 완벽하게 극복해내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 남은 방법은 고분고분한 복종 밖에 없을까.   


 울트라 마라토너 리치 롤은 한 때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중독을 어떻게 극복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극복이요? 아직도 매일 싸우고 있는데요?'


  우리도 매일 싸울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싸움의 대상이 중요하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자신과 싸울 것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자연법처럼 요구하는 시선과 싸워야 한다. 내 몸을 탓하는 대신 내 몸을 저주하게 만든 존재에 대해서 따져 물어야 한다. 매번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기는 날이 조금씩 많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겨나갈 때 어떤 모양의 몸도 존재 자체로 환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거기서는 다이에트에 대한 수다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섹스 체위에 대해서 말해도 좋겠다.

 그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몸의 의무가 아니라 내 몸이 원하는 욕망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리하여 내 몸이 내 것임을 느끼고 싶다. 이데아는 저기에 있다는 플라톤 아저씨한테서는 구린내가 난다는 사실을 잊을 만하면 끄집어내고, 내가 있는 곳에서 내 몸과 재밌게 지내는 일이 가장 힙한 일임을 되새겨 생각할 것이다.


 몸은 나의 움직임이고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물이다. 자유란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데에 있다. 내가 속한 세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자유로운 세계를 지향하기 위하여 내 몸을 움직일 수는 있다. 

 내 몸의 주인이 되는 대신 다시 한 번 몸의 노예가 되고 말았지만 스무살 적 노예보다 탈출이 빨랐다는 사실에 희망을 보기로 한다. 서른에서 마흔이 될 동안에는 싸움을 위해 기술을 더 기를 필요가 있겠다. 싸우기 전에 일단 밥부터 먹고 싶다. 맛있게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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