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en May 05. 2021

같이 술 한 잔 해요

<데이터 1> 맞벌이 가구 46% 중 하루 평균 아내는 4시간 37분을, 남편은 5시간 50분의 '유급 노동'을 한다. ( 통계청, 지역별 고용조사(2019년)) 오래도록 돈이 되는 노동만이 노동으로 인정되어왔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지역 이동을 할 때마다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다녔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서 했다고 한다. 배고프다고 찡찡대기 전에 입에 넣을 밥을 차려주는 일, 옷을 빨고 잠자리를 정리해주는 일, 방을 쓸고 닦는 일, 먼지를 털어내는 일과 같이 매일 반복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뒷 구석의 일들. 이러한 노동에 너무 뒤늦게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이 달렸다. 한국 사회에서 아내들의 가사노동이 평균 3시간 7분일 때, 남편들의 그것은 평균 54분을 기록한다. 아내는 남편보다 하루 평균 2시간 이상의 노동을 더 한다. (통계청, 생활시간 조사, 2019년)  


*추신 '부엌이야말로 여성이 가장 창의적일 수 있는 곳이다.' 주워 들은 말이다.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점심 도시락에 싸갈 반찬들, 내일 저녁에는 남은 반찬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계산, 그다음 날들을 위해서 마트에 가서 사야 할 야채들을 일상 사이사이에 생각하고, 똑같은 것만 먹는다는 가족 구성원들의 반찬 투정을 듣지 않기 위하여 좀 더 창의적인 레시피들을 검색하고 바쁜 마음과 손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일이 부엌 외의 공간, 여자들의 머릿속 부엌에서도 수시로 일어난다는 점을 짚고 싶다.  그러나 여성들이 창의적일 수 있는 공간이 부엌으로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집 안(사적인 공간) 뿐만 아니라 밖(공적인 공간)에서도 넘치게 창의적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엄마에게 부엌이 의무와 책임감으로 쌓아올린 성이라면, 나는 반찬집에서 반찬을 사다가 냉장고를 채운다. 엄마가 몇십년간 홀로 창의성을 분출해온 노동의 공간에서 나는 내 지분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혹은 내 노동이 공평할 수 있기 위하여 애쓴다. 부엌이라는 공간, 가사노동이라는 분명한 선이 없는 시간에 대하여 나는 내가 같이 살고 있는 남자에게 희생당하지 않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운다. '나는 요리는 못해.'라고 순진한 얼굴로 말하는 남자들은 아직 엄마의 그늘 아래 숨어있는 어린 애다.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을 요리할 줄 모르면서 먹는 짓만 하는 것을 찝찝하게 여길 줄 모르는 뻔뻔함과, 자기가 머무는 공간에서 쉬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쉴만한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청소에 대해서 게으를 수 있는 무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Patriarchy. 한국 교육이 가사 노동과 음식 조리법에 대해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다면 미래의 남녀 성 갈등을 줄이는데 일조할 것 같다. 그와 내가 가사 노동에서 공평해질 때에만 나는 내 창의성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여유를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내가 가장 창의적일 수 있는 곳은 그곳이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능하다.  

 

<데이터 2> 한국은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발표하는 성 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에서 189개국 중 11위(0.064)를 기록했다. 이 수치를 거머쥔 남성들의 함성이 들린다. 이것 봐라! 11등이면 이제 꽤 평등하다는 거잖아? 그만 설치고 깝죽거리고, 역차별을 멈춰라! 반면 세계경제포럼(WEP)에서 발표한 성격차지수(Gender Gap Index)에에 따르면, 한국은 153개국 중 108위로 여전히, 하위권이다. 숫자 뒤에 숨겨진 깨알 정보들을 살펴봐야지만 '성 불평등'과 '성격차'의 조사 결과가 왜 이렇게 큰 차이를 반영하는지 알 수 있다. 

 성불평등지수가 '절댓값'으로 반영하는 지표는 모성 사망비라든지, 청소년 출산율과 같은 것으로, 이 지수는 여성들의 경제활동 영역 지표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A 국가가 경제적으로 살만한 국가라면 자연스럽게 A국 여성들의 성 불평등지수도 낮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한 국가의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지수가 아니라 A 국가와 B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여성 삶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데에 적합한 수치다.

 반면에 성격차지수는 남녀 격차를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경제참여 및 기회, 교육적 성취, 정치적 권한 등등에 대한  (절대적인 수준이 아닌) 상대적인 격차를 측정한다. 따라서 한 국가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들의 경제 참여도가 어느 수준인지, 교육적 차별은 없는지 등등을 살펴보려면 성격차지수를 재고해야함이 옳다. (*한겨레 '성 격차 열등생인 한국, 성 평등은 우등생?' 기사 참고) 


<데이터 3>한국 사회에서 맞벌이는 당연한 말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가사 노동에 시달려왔던 엄마들이 일터에서마저 아빠들 밑에서 일하고 있을 거란 사실이다. 한국에서 관리자 직종의 여성 비율은 15.7%, 남성 비율 84.3%이다. 2020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표한 우리나라의 유리천장 지수(Glass-ceiling index; 여성의 근로환경 및 관리직 승진 기회를 반영하는 통계지표)는 24.8점으로 29개국 중에 29위다. 1위 스웨덴은 84점이다. 스웨덴으로 이민 갈 생각을 왜 좀 더 어릴 때 하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밀려온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별 임금 격차가 34.1%에 이르는데, 이 차이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크다.

<술자리에서 1> A는 자기 여자친구를 아줌마라고 소개했다.

-여자 친구가 이미 결혼을 했나 봐요? 아니면 연상을 만나시는 건가?  

-어?

-아니, 아줌마라면서요, 아줌마 뜻을 그래요, 결혼했거나 중년인 여성.

-아니~ 늙었다는 말이지~

-여자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이 자리에서 여자 친구를 그런 식으로 소개하실 수 있겠어요?  
 A가 얘 뭐냐는 식으로 내 남자친구를남자 친구를 쳐다본다. 나도 넌 뭐 이런 친구를 친구라고 뒀냐는 시선으로 남자 친구를 쳐다봤다.   

-야 너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엄마 성을 따르게 할 수 있겠어?

어라? 남자친구가 우리 두 사람 모두를 도발하고 싶었을까? 여자 친구를 늙은 아줌마라고 소개하는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답이 기대되는 사람에게. A는 마시던 맥주를 급하게 삼켜내면서 뭐 그런 질문이 다 있냐고 뜨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본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해야하는데?! 


 2005년 헌법재판소가 호주제를 위헌이라고 판결한 이후로 아이가 엄마 성을 따르는 것은 가능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엄마 성을 따르는 아이의 비율은 매우 적다.(2020년 한 해의 혼인 건주는 대략 21만 4000건인데, 그중 엄마 성을 따르겠다는 협의서를 신청한 건수는 204건이다. 법원 행정처 제출자료 (2020.8)) 민법 제781조 1항(‘자는 부의 성·본(本)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합의했을 경우 모의 성·본을 따를 수 있다’) 때문에 아이가 엄마 성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혼인 신고를 할 때(아이의 출생 신고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미리 결정을 해야 한다는 점, 또한 부부가 합의했다는 협의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점과 같이 부성을 따르는 데에는 요구되지 않는 조건들이 모성을 따르는 데에는 요구된다.   


 이런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내 성을 붙여주고 싶다고, 남자 친구에게 말한 적 있다. 그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그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응. 21만 쌍이 결혼하는데 0.001%만 엄마 성을 따른다잖아? 너무 불균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얼마나 오랫동안 모두가 아빠 성을 따라왔어? 꼭 그래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아이가 엄마 성을 따르는 일이 드물고 이상한 일로 여겨지는 사회 인식이 바뀌려면 실제로 엄마 성을 따르는 아이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 또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나라도 그렇게 해야지. 왜? 뭔가 불합리하게 느껴져?

이런 대화를 남자 친구와 잠깐 나눈 적 있었는데, 그가 내게 받았던 질문을 '아줌마 여자 친구'랑 결혼할 생각인 친구 A에게 던진 것이다. A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해야 하는 거냐? 내가 하기 싫다는 게 아니고, 애가 걱정돼서 그래. 내가 친아빠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 아니냐. 애한테 피해야, 피해. 


 <술자리에서 2> B는 새로 만난 '어린' 여자 친구를 자랑하는데 바빴다.

-걔가 요즘 취업 준비 중이거든. 내가 30만 원씩 용돈 줘. 스터디 나가서 기죽지 말고 커피 사 먹으라고. 근데 얘가 어떤 얘냐면, 그 돈으로 우리가 덮을 간절기 이불을 사 오더라. 감동을 안 할 수 있냐?

-아, 오빠가 부모님 같은 거구나?  

-뭐 그지, (자기 자신을 가르치면서) 믿을 구석이 있으니까 정규직으로 바꿔주겠다는 회사도 힘들다고 그만둘 수 있지.

-회사 일이 많이 힘든가 봐요?

-뭐든 안 힘들겠어? 여자 애들이 그렇잖아,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니까.

-오빠도 결혼할 생각이에요?

-응, 근데 아직 우리 집에는 안 데려가. 우리 집은 워낙 보수적이라서 한 번 발들이면 끝이거든. 얘는 우리 집 식구 되는 건데, 아직 감당이 안 될 거야.
 

 대화는 저런 식이였다. 맥주 500이 몇 잔 더 비워지고 그가 페미니즘을 욕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아서 찾아봤거든. 네가 사는 나라의 페미니즘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이란 건 죄다 남성 혐오야. 권리만 주장하는 거지. 우리 회사만 봐도 여자 애들은 힘든 일 안 하려고 들어. 그러니까 진급이 안 되는 건데 구조 탓만, 사회 탓만 하고 드는 거지. 페미니즘이 유행인 줄 알고 다 따라 하긴 하는데, 알고 보면 날 좀 더 챙겨 달라는 거야. 사회에 기여하는 건 별로 없으면서 요구하는 건 겁나게 많다니까.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잘못 들어온 거야. 나는 우리 땡땡이가 이상한 여자애들이랑 어울릴까 봐 겁나. 물들까 봐. 

 뒤이어 친구 B는 주식과 부동산 정보를 쏟아냈다. 마치 내가 그것들에 관심이 있다고, 제발 좀 알려달라고 사정한 사람인 것처럼 잘 들어도라는 훈수도 틈틈이 덧붙였다. 친구 B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여성들이 겪어왔고, 여전히 겪고 있는 성간의 계급 차별을 드러냈다. 그는 나를 모르는 게 한가득인 어린 여자 아이 취급을 했다. 발언권은 그에게 있고 나는 그저 (꼴페미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듯이, 상대가 원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 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일에 열중했다. 그렇다면 나도 너처럼 무식하게 목소리가 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잘 안다는 당신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여성과 자연에 가한 폭력과 억압의 역사에 대해서 정말 잘 알면서도 페미니즘이 '이상한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놀라운 일이라로 말했다. 인종 차별, 종 차별, 장애인 차별, 성차별 같은 건 모두 같은 맥락에 있는 거라고, 당한 사람들은 그것의 잘못됨에 대해서 사무치게 아는데, 백인들은, 인간들은, 비장애인들은, 남성들은 노력을 해야지만 가까스로 알 수도 있는 거라고, 근데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여전히 가부장적인 억압을 행사하는 거라고.

- B! 네가 알아두면 좋을 만을 태도 하나를 알려둘게. 잘 들어봐 인마. 김영하가 그런 말을 했지. '저는 요즘 페미니즘 무브먼트를 보면서 생각해요. 아, 지금은 내가 들어줘야 할 때구나.' B! 너도 지식인 취급을 받고 싶은 거면, 먼저 잘 들어 인마!   


 친구 A와 B가 내 얘기에 감동했냐고? 전혀. 그들에게 내 입 밖에서 나오는 말들은 피해망상적이거나 감성적인 한 여자 아이의 우울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웃기는 놈들이었다. 자기들이 침 튀기면서 내뱉는 욕설은 자연스러운 추임새가 되는데 내가 관자놀이에 핏발을 새운다고 지랄이었다. 앞에서 데이터를 들먹이고 소수점까지 이어지는 숫자들을 나열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과의 조우는 내게 데이터의 필요성을 일깨워줬다. 나는 다음에 그들을 만날 때 노트에다 팩트를 기반으로 한 숫자들을 적어가면서 그들을 훈육시키고 싶다. 그들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잘 들어두라고 훈계를 두면서. 


 내 작은 반항이 진실로 소용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본능이라는 게 있고 특히 권력을 잡은 존재들은 귀를 잃고 눈가 리막을 가진 경주마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내 말이 그거야. 지금 네가 하는 이야기들이야말로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본 것들이야. 

 한 집단의 권력이 시작된 이후로,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어 쌓여 간다. 두꺼운 퇴적층을 만들어낸다. 견고하고 절대적인 세계가 된다. 세계의 구성 요소들은 그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그들 스스로 거기서 숨 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안에 속한 자들이 자신들의 위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이 필요하지만, 이는 권력 자체를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불필요한 능력으로 간주되고 서서히 퇴화된다. 세계 안에 속한 자들은 세계의 옳고 그름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세계를 침범하려는 자, 세계의 틈을 넓히려는 자들에게 마녀라는 낙인을 찍고 고개 숙이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들은 자신들이 숨 쉬는 공기와 편리함이 무너지는 게 두렵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자는 이민자들의 요구를 도둑질로 취급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저 아래로 주변부로 치워버리고 싶다. 이민자들이 여성들이 아프리카 아메리칸들이 장애인들이 동물들이 오랜 시간 동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얌전하고 조신하게 저 아래의 그들 자리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파괴자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지만, 부쉬 지고 다시 세워져야 할 세계가 있다면 방치질이든 도끼질이든 뭐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자 친구의 친구들, A와 B를 만날 때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단단한 장비를 갖추고, 나는 그의 친구 C와 D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여자 친구들에게도 장비를 제대로 갖춰 입자고 말하기로 한다. 세상에는 부술 수 없더라도 부수는 일에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가난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