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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한 유니씨 Oct 14. 2019

<길 위의 동백>

-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꽃무늬 좋아하는 이유는 꽃을 좋아해서라기 보다 무늬 자체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잔 꽃 패턴은 귀엽고 부드러운 느낌이 어딘지 유년 시절을 떠오르게 하고, 큰 꽃무늬는 거침없는 화려함이 다른 무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고유한 멋을 풍긴다. 꽃은, 꽃 일 때 보다 무늬로 정녕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 될 수도 있겠다, 꽃이 아무리 많아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꽃무늬의 미덕 이랄까. 꽃무늬 옷, 꽃무늬 가방, 문구류, 악세사리... 꽃무늬 특유의 예쁨이 있다. 


그에 비해 꽃은 그냥 꽃이었다. 사실 그 동안은 꽃을 좋아할 시간들은 아니었다. 사람이 꽃이고 노는 데가 꽃밭인 젊음인데 따로 무슨 꽃을 눈에 익히고 들여다볼까. 꽃이란 그저 졸업, 입학, 생일, 결혼식. 다시 입학, 졸업, 생일, 어버이날, 장례식... 시간 따라 반복되고 이어지듯 꽃 또한 그 언저리를 맴돌며 존재감을 발휘할 뿐이라고만, 그렇게만 소용 닿는 것, 소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정말 한 해 두 해 나이를 보태다 보니 꽃이 꽃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개나리를 40년쯤 봤을 텐데도 한 해 한 해 개나리가 점점 더 예뻐 보이는 것. 개나리 가면 장미 오고 장미 떨어질 때 능소화 피어 나고, 여름 지나면서 나팔꽃 터지고… 꽃들의 순서를 기다리거나 반가워지는 일들. 그런 나이 듦이 내게도 온 것이다.


하지만 또 나이 듦과 다르게, 그러니까 시간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흐르는 세월 아쉬운 만큼 예쁘다며 보게 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마음에 꽉 들어차는 꽃을 만났으니. 오로지 꽃만 보일 뿐, 가는 세월이든 오는 나이이든 다른 상념으로 이어지지 않는 꽃, 그게 바로 동백꽃이었다.


일단 너무 새로운 꽃이었다. 왜냐고? 가장 현실적인 이유라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을 벗어난 적 없던 내게 동백은 익숙한 꽃이 아니었던 까닭이 크다. 남쪽에서 나고 자라는 동백이 그 동안의 내 삶에 있었을 리 없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움은 그런 거다. 내가 꽃이란 걸 꽃으로 바라보는 안목이 이제 막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때 딱 동백을 마주하게 된 것, 근데 그게 더 없이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예쁘고 아름다운 꽃을 아주 그냥 외 나무 다리에서 맞닥뜨린 것 같이,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고 뒷걸음질도 의미 없을 그 정정당당한 대면, 동백을 그렇게 마주하다 보니 동백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16 010607 오조리 동백

내 기억 속 동백은 ‘떨어진 동백’이 먼저다. 몇 해 전 3월, 봄이라곤 해도 꽤 쌀쌀했던 통영이었다. 눈 앞으로 남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굽이진 해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도로변의 가로수 아래로 무언가 떨어진 게 보이기 시작했다. 크기가 제법 큰 덩어리들에다 색이 선명했다. 시들시들한 떨어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그것들은 한 두 개 떨어지고 만 게 아니라 쭈욱, 길 따라 나무 따라 같은 모양이 이어지고 있었다. 도로는 한적했고 일단 차를 세우고 내렸다. 가까이 다가가 땅 위의 빨강을 들여다 보니 세상에 그게 동백꽃이었다. 나무에 매달린 꽃도 있었을 테지만 송이째 땅으로 떨어진 동백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흩날리는 벚 꽃잎은 세상에 점묘화를 찍듯 제 잎을 날리며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작은 봉우리에서 만개한 장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놓기 싫은 듯 활짝 피우다 못해 바깥으로 꽃잎이 말려 세모꼴이 될 정도로 생명을 버틴다. 하지만 동백은 시들어서도 아니고 꽃잎을 날리는 것도 아닌 송이째 자신을 떨군다. 마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느낌, 처연함 같은 게 느껴진다. 낙하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송이째 떨어지는 동백은 길 위에서도 하염없이 선명하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백은 왜 그럴까. 원하는 시간만큼 오래 앉아있진 못했지만 그 모습만큼은 잊히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통영을 떠나며 봉인했던 동백이 마침내 이 곳에 와서 제대로 풀려버렸다. 1월의 동백 또한 처음 보았다. 아직 송이를 떨구기 전, 초록 잎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빨강으로 나무 곳곳에 피어 있었다. 아무리 제주도지만 1월의 바람은 차고 기온도 낮은데 어떻게 저렇게 보드라운 꽃잎에 힘을 모아 제 모습을 완성하는지 신비로웠다. 이파리는 빠닥빠닥 힘있고 두꺼워서 겨울이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뭘 믿고 한겨울에 피어났을지 아무리 봐도 붉은 꽃잎만큼은 미스터리 했다. 자연의 섭리라고 퉁 치기엔 정말이지 동백은 왜 그럴까 싶었다. 


오조리, 종달리, 그리고 하도리에서. 그 길에 나서고 그 길을 걸으면서 다른 것도 아닌 동백을 마주한 것이 새삼 기뻤다. 아이와 둘이 걷는, 단출하거나 쓸쓸할지도 모를 발걸음에 활짝 핀 동백이 있어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펼쳐진 것 같았다. 춥고 쌀쌀한 날씨에 풍성한 빨강들이 따스하고도 감미로웠다. 마치 동백을 보러 여행 온 것처럼, 길에서 만난 동백 덕분에 환대 받는 기분으로 풍요로운 시간을 걸었다. 손에 닿는 높이면 시린 손을 대보기도 하고 혹시 머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동백은 점점, 선명한 붉은 빛으로 초록에 둘러 쌓인 보드라움으로 온 송이의 아름다움으로 내 마음에 들어왔다.


동백을 보고 난 뒤 꽃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꽃은 보러 가는 것이다. 꽃을 꺾어다 내 곁에 두지 말고 거기 있는 꽃을 보러 내가 꽃 곁으로 가는 것,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게 꽃이다. 개나리가 보고 싶으면 봄의 한강변을 걸으면 되고 동백이 보고 싶으면 겨울 제주도로 냉큼 달려갈 일이다. 4월 벚꽃, 6월의 능소화, 5월 장미도 조금만 발걸음을 재촉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래서 꽃을 좋아한다는 말에 꽃을 보러 가는 여정까지도 포함이 되기를, 그렇게 나의 삶이 조금씩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꽃 보러 나서는 일이 꽃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 철마다 해마다 기다려지고 설레는 일이 되기를, 아름답고 풍요로운 발걸음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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