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피할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정류장 바로 뒤가 문제의 그곳,승마 체험장 이었다. 아이는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나도 모르는 척, 체험장을 등지고 차도를 향해 섰다. 빨리 버스가 왔으면 좋겠는데 올 생각이 없는지 도로는 계속 조용했다. 버스 노선을 검색, 확인했지만 정확한 도착 시간이 나오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계속 불어서 아이를 안아주며 시야를 막았다. 그러면서 체험장 쪽을 보니 저 멀리 한 두 마리 말이 보이고 마부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버스가 왔다. 아니, 우리 거 말고 관광버스. 목적지에 도착한 대형 버스는 속도를 줄이며 느릿느릿, 코 앞을 지나 체험장으로 쏙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몰랐다. 버스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내렸다. 아이가 내 팔을 풀었다. 조용하던 한낮의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풍경으로 귀가 열리는 건 당연했다. 둘 다 뒤돌아 서서 눈앞을 직시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말들이 마부에 이끌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웅성웅성, 예약이 되어있었던 듯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모자와 조끼를 쓰고 입고 나와 한 곳에 모였다. 아이는 추위 따위는 애 저녁에 잊은 듯 목을 길게 빼고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그곳의 풍경을 주시했다. 몇 초나 지났을까, 흑갈색 말들을 발견하고 아, 하는 작은 탄성이 나오나 싶더니 주문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엄마, 나도 말 타고 싶어”
올 것이 왔구나, 세상에 난 지 8년 밖에 안 된 아이 사람은, 보고 듣기보다 만지거나 가 보거나, 몸과 행위로 세상을 탐색하는 자 들임이 분명했다. ‘우리는 지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잖니’ 아이에게 우리의 처지를 확실히 알려주고 2~3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나보다. 하지만 한 번 걸린 주문은 멈추지 않았고 기별 없는 버스를 원망하며 체험장 안으로 끌려가듯 들어섰다.
처음엔 아이만 태우려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트렉 한 바퀴만 돌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코스는 따로 있었다. 길게 도는 코스와 짧게 도는 코스, 거리에 따라 시간과 체험비도 달랐다. 당연히 짧은 코스를 선택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코스는 저 안쪽 숲까지 들어갔다 돌아 나오는 것인데, 마부가 말을 끌고 가면 기다리는 내 눈에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끌지 않는 한 처음 보는 마부에게 아이를 맡겨 보내야 하는 것인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말에게 미안했지만 둘이 타면 안되냐고 했더니 당연히 안 된다는 손사래.
결국 우리는 말 두 마리에 각각 따로 앉아 짧은 코스 한 바퀴를 돌았다. 사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아느냐,’ 나도 잘 쓰는 말이긴 하다. 눈으로 보고 말로만 듣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몸으로 ‘행함’ 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도 귀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또 그만큼 잘 쓰는 표현이 있다. ‘똥 된장 찍어 먹어봐야 아느냐’. 이 말은 꼭 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 ‘공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 아닌 것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 나와 같지 않은 취향, 내가 모르는 타인의 입장이나 경험들.내가 다 해 볼 수 없기 때문에 발휘되는 것이 바로 공감능력일 것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데에는 경험만큼이나 나 아닌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이 같은 태도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입장을 다 살아볼 수도 없지만 우리에겐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나와 다른 차이들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꼭 그에 대한 경험, 체험이 없어도 얼마든지 갖출 수 있는 태도이다. 먹어보지 않아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할 수 있고, 내가 아프지 않아서 그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손을 잡아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고통을 나눌 수 있지 않은가.
말 타기 체험, 나의 경우엔 꼭 안 해도 됐던 것이다. 승마를 배워볼 생각이 아직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고, 말 등에서의 뷰가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말 위에 앉아서 ‘내 경험은 소중하니까!’ 말 타기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앉아있는 내내, 타박타박 나아가는 말 어깨근육이 느껴졌다. 1월의 찬 공기로 뿜어져 흩어지던 말의 숨소리와 입김을 듣고 보았다. 마차시대도 아니고, 이것도 체험이라고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앉아있는 건지 뭔가 되게 어정쩡 하고 조화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내려와, 말 옆에서 땅을 밟고 싶었다.
아이는 나와 같지 않은 존재임이 확실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을 본 것도 처음이었겠고 말 등에 올라 자기 키보다 두 배는 높아진 시야를 가져본 적도 처음이었을 테니. 한 바퀴 다 돌고 나자 마부는 사진 찍기를 권했다. 그것까지가 자신의 임무인 듯 했다. 코스를 도는 동안 휴대폰 사용을(카메라) 못 하게 하더라니. 말들이 셔터 소리에 놀라 돌발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아이는 말에 탄 자신의 모습을 남기길 ‘당연히’ 원했다. 사진은 아이만 찍었고 몇 분 기다려 인화된 사진을 받았다.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 동안 버스가 몇 대나 지나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배도 고파왔다. 무엇보다, 뭔가가 허탈했는데 뭘 해서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뭐든 하지 말았어야 할 걸 해버려서 빈곤한 느낌, 바닥이 드러난 기분 이랄까. 더 이상 버스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밥을 차려 먹었다. 바닥이었던 기분도 어느 정도 차 올랐다.
주섬주섬 가방을 정리하며 받아온 사진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마냥 좋다고 웃고 있는 아이 얼굴이 더 없이 귀여우면서도, 이게 그저 웃을 일인가 입가가 금세 굳어졌다. 아이 얼굴에서 시선을 옮겨 말을 보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 갑자기, 눈물이 훅 올라오더니 뚝 떨어졌다. 뭐지 이게? 전혀 예상 밖의 눈물이라 내 눈에서 나오는데도 대체 왠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을 들여다 보았다. 아이를 등에 태운 채 네 다리를 곧게 펴고 서 있는 말. 아, 알 것 같았다. 눈, 말의 그 눈 때문이었다. 말은 고개를 들지 않고 아래를, 땅을 보고 서 있었다. 그래서 눈동자 대신 눈 꺼풀의 긴 눈썹을 보이고 있었다. 표현하진 않지만 말해주는 것, 내리 깐 말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했을 때 이 말은, 사진 찍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건 자기 등에 올라탄 사람의 일이고, 자기는 머리를 낮춰 ‘눈을 깔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운 것 같았다. 갈기를 휘날리며 초원을 달리는 말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다소곳하게 서서 ‘승객’의 다음 의식을 기다리는 말 잘 듣는 말. 카메라를 향해 섰지만 결코 눈을 맞추지 않는 눈, 카메라를 쳐다보면 안 된다고, 오래 학습된 것 같은 몸짓.
아이랑 오늘의 말 이야기를 해볼까 하다가 얼른 사진을 집어 넣었다. 그냥 나의 쓸 데 없는 ‘오바’ 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말은 카메라를 잘 알고 있고, 어쩌면 자신의 등에 사람 태우는 일을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저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오히려 오만이고 시혜적이라고, 잘못된 것 없고 잘 될 것도 없는 일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말은 한번 타 봤으니 이제 안 타도 되겠다고, 언젠가 다시 말을 타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르니 오늘 기억을 잘 넣어뒀다 그 때가 오면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