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2018년 1월 23일. 두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 셋은 냉면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냉면은 사시사철 먹지만, 겨울에 먹어줘야 하는 이런 이유도 있다. 난방이 빵빵한 실내에 있다 보면 피부는 마른 듯 미끄럽고 머리카락은 정전기로 들러붙는다. 거기서 땀만 안 흘린다 뿐이지, 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 같고 목 안이 답답해서 물을 마셔도 그때뿐이다. 머리도 띵 하고 손끝에도 정전기가 인다. 이 때 필요한 거 뭐? 평양냉면. 사실 그냥 다 필요 없고 이거 하나면 모든 이유를 앞선다, 평양냉면? 맛있으니까!
하여튼, 우리는 후딱 볼 일을 보고, 근처 이름난 냉면집으로 이동, 냉면에 수육, 막걸리도 한 잔 부딪치기로 했다. 이제 막 시작된 새 해도 기념하고 건너뛴 송년회도 만회할 겸 말이다.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은 순조로웠다. 얼마 전 이사 해 새 단장을 마친 로비는 쾌적하고 무엇보다 20층 뷰가 좋았다. 1층에서 사 들고 올라온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푹신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소란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예약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우리의 냉면 회동 또한 바짝 가까워질 터였다.
드디어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작전은 같이 짜도 총대는 혼자 매야 하는 법. 카페처럼 여유로웠던 우리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잠깐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려는 것처럼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나와라’, 친구들을 뒤로 하고 진료실로 향했다.
몇 번 만났던 의사 선생의 표정이나 말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예의 분위기와 다를 게 없었다. 선생은 모니터를 보며 말했고 그 화면은 내 자리에서도 보였는데 어디가 어디라는 지 보여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같은 부분을 한 번, 두 번, 세 번 검사 하고 그 마지막 결과를 들으러 온 참이었다.
의사 선생은 오래 뜸 들이진 않았지만 몇 번의 검사 과정과 결과를 길게 이야기했다. 참 나도 무신경한 거지, ‘아, 괜찮아요, 좋아요, 이상 없어요’ 가 결과였다면 이렇게 길었을 일이 아니었을 것. 뭔가 심각성을 알아 챘어야 했는데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선생의 이야기를 무슨 학술 세미나 발표를 듣고 있는 청중처럼 착실히, 게다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충격을 흡수, 완화 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달까.
급기야 선생의 ‘이건 종양이고 수술해야 된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놀랍지 않았다. 그것이 믿기지 않아서였는지 올 것이 왔구나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타고나길 세상 놀라고 급할 거 없다고 믿는 성격이었던 건지, 나는 지금까지도 그 때 그 진료실에서의 내 태도가 뭐였다고 정확히 말 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동요하지 않았고 하다못해 한 방울 눈물도 나오지 않았던지 정말 모르겠다.
그냥, 의사 선생은 (지금 생각하면 할수록 진심으로 고맙게도) 너무나 씸플하게 말해주었고 대수이겠으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선생 말을 역시 나도, ‘응 그래, 암이 맞구나’, 더 없이 씸플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은 내게 계속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근데 사실 나 혼자였으니 내가 환자이자 보호자이기도 했지만. 외과 수술이 가능한 대학병원 같은 데를 갈 것과 그 때 제출해야 할 기록과 결과지, 영상 자료 등등 두툼해진 서류와 담을 봉투까지 챙겨주었다.
그 와중에 나는 또 선생의 펜을 빌려 무언가 받아 적고 맞는지 확인하고, 받아 든 종이들을 넘겨보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진료실을 나와야 하니까 주섬주섬 서류들을 봉투에 넣고 빌렸던 펜도 주인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선생은 뒤돌아 선 나에게 또 차분하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수술하면 괜찮을 것’ 이라 말했는데 하마터면 ‘안녕히 가세요’ 라고 알아들을 뻔 했을 만큼 끝까지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나도 ‘아,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지하철 자리를 양보 받은 것처럼 어렵지 않은 상황을 종료하듯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의사는 내 상태를 의학적으로 말해 주었고 나는 그 말을 알아 들었으며 앞으로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나는 이 문제에서 어느 정도 빠져 나온 것, 이제 해결책으로 뻗으면 될 것이었다. 문제는 의사와 나 사이에 있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마주해야 할 두고 온 내 친구 둘, 그들과 나 사이에 있었다.
서류봉투를 손에 들고(결과가 괜찮다면 봉투를 들고 나올 필요가 없겠지. 의사: 괜찮아요. 나: 감사합니다. 동시에: 2년 후에 만나요. 하고 나오면 땡) 그들을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이 어때야 할까. 내게로 와 박히는 네 개의 눈동자를 나는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내가 나온 저들 사이의 자리에 다시 돌아가 앉을 수 있을까. 진료실로 들어갈 때 보다 나오는 게 더 어려웠다.
게다가, 냉면도 먹고 막걸리도 땡겨야 되는데 분위기 죽 되면 어떡하나. 나 때문에 이 추운 날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예상치 못한 꼴이라니… 진료실을 나와 그들 앞에 서기까지 몇 발짝, 제발 표정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길 바랐다.
우리는 계획대로 냉면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정대로 차디찬 평양냉면을 후루룩 마시듯 씹어 넘기며 한겨울의 건조함을 적셨다. 빠질 수 없는 수육에 막걸리도 한 사발씩 따라 밝아 온 새 해를 기념했다. 그리고 아무도 울지 않았고 흥분(오바)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자빠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온전히 그 시간들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 이 친구들과 함께 한 그 자리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 자리는 내가,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암환자’로 인식되는 첫 자리였다. 울고 시작하지 않아서 다음 사람들을 만나 비슷한 자리를 이어가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우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누구 못지 않게 잘 우는 게 나다. 신문기사부터 드라마, 영화, 책, 다큐멘터리까지 별 데에서 별별 눈물을 다 쏟는다. 내가 싫은 건, 나 때문에 내가 우는 거. 그게 나는 싫다. 그러다 보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는 것도 싫다. 나는 울리는 사람보다 웃기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 다행이었다. 우리가 그런 친구들이라는 것, 안 울고 안 울리는 친구로 삼십년쯤 된 사이라는 것이. 물론 그게 나이를 먹어 나오는 내공인 건지 나이를 먹어 안 나오는 눈물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거운 봉투를 들고 로비로 나갔을 때, 나를 바라보던 두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좋은 결과를 들려주지 못한 건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미안해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울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꾸역꾸역 냉면을 삼키거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막걸리 사발을 손에 쥐면서 나는, 내가 여전히 이 친구들 사이에, 이 친구들과 함께 자리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