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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크한 유니씨 Aug 08. 2020

<가벼운 여행자>

-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여행에서 딱 하나, 조금 싫은 과정은 바로 짐을 싸는 일이다. 짧게 짧게, 짬 나거나 말 나는 대로 동쪽 강원도부터 남쪽 제주도까지 어렵지 않게 다니는 편인데, 늘 쌌다 풀었다 반복하는 일이 아주 조금 그러나 가끔 많이 어렵고 귀찮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여행 텀이 한 달 미만이면 캐리어를 그냥 마루 한쪽에 펼쳐 둘 때도 있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뺄 거 빼고 챙길 건 챙기며 야금야금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다. 누가 보면 엄청 꼼꼼하고 계획적이다 할지 모르겠으나 다녀온 짐과 다시 갈 짐이 오버랩되는 긴 시간일 뿐이란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어떤 출발은, 옷도 다 입었고 현관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데 그때까지도 캐리어는 쩍 벌어진 채 어제나 그제처럼 누워있을 때도 있다. 이럴 땐 ‘차 막혀서 비행기 못 타지, 가방 문 못 닫아서 비행기 놓칠까’, 가볍게 가방을 끌고 와 현관에 쭈구리고 앉은 다음, 한번에 가방을 포개 지퍼를 잠근다.


옛날 옛적, tv를 너무 좋아하는 하나밖에 없는 오래비가 고3이었을 때, 엄마는 집에서 tv를 퇴출해버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tv는 잘못이 없다. 하지만 실패한 전략으로 가족사에 남았다. 우리 집 바로 옆 동에 큰삼촌 댁, 그 앞 앞 동에 외가댁이 있었다. 오빠는 할머니댁을 경유, 하교하기 시작했고 그건 참새에게 방앗간 열쇠를 맡겼다는 의미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에 안 계실 때도 오빠가 다녀간 것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알 수 있었는데 현관 신발장 위에 오빠가 꼭 쥐었던 리모컨이 매번 뚝심 있게 놓여있었기 때문에.


잔소리를 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빠는 신 신고 나가기 직전까지, tv에 눈과 귀를 고정하느라 리모컨의 알리바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알리바이를 조작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따박따박 자신의 흔적을 남겨가며 현관문 앞에서 tv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


2020 0601 비양도가 보이는 금능


갑자기 이 오래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왜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현관에 서서 우린 꽤나 중차대한 일을 마무리하고 또 벌인다. 오빠의 리모컨이나, 나의 캐리어 서사를 현관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관문은 말이 없을 뿐.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본다. 가방 들고 집 떠나는 건 날아갈 듯 좋아하면서 왜 이토록 짐 싸는 일은 최대한 미루는 행위가 되는 건지. 내 여행에 있어 짐 싸기는 극복해야 할 첫 단계인가 아님, 일종의 리추얼로 두고 즐겨야 할 과정일까.


첫 번째 신빙성 없는 결론은, 짐 싸기란 ‘선택’이고 내가 선택에 애를 먹는구나, 이다. 여행 가방이란 삶이 그런 것처럼 무수히 흔들리고 번복되는 선택들 끝에 꾸려지지 않나. 아직 가 보지 않은 시공간에 소용 닿을 물건을 추리는 일은, 적당한 예상과 가늠에서 시작해도 족집게 같은 통찰과 노하우로 완료되길 원하기 때문에. 하지만 여행도 는다고, 여행 스타일이나 취향, 패턴 등이 비슷하게 반복되다 보니 ‘척 보면 압니다’, 취사선택에 애를 먹는 단계는 지났다. 신빙성 없다고 밝힌 이유이다.     


한편, 여행 가방을 눌러 닫던 현관과 여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들여놓는 현관은 다른 서사를 받아들인다. 여행은 끝났고 가방은 무게를 더 해서 현관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잠깐, 나는 현관에 그대로 멈춰 서서 내가 나온, 이제 곧 들어가야 할 세상을 훑어본다. 나 없이 그들만의 미장센을 유지했을, 내가 두고 간 살림들 하나하나에 눈을 맞춰본다. 


식탁 위의 리모컨이나 한쪽 구석에 개켜 둔 빨래들, 아무도 굴려주지 않았을 마룻바닥의 폼 롤러,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이다 탈락,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 옷가지며 책들. 여행을 앞두고 들었던 음반 자켓이나 끄적였던 노트들.

잘 있었니? 들리지 않는 대답을 더듬듯 눈으로 풍경을 감지하다가 문득, 내가 빠져나오고 난 다음, 현관문 뒤로 멈췄을 이들의 시간과 공간이 궁금해졌다. 혹시 나를 기다렸을까. 사실 이들도 북 치고 장구 치며 웃고 떠들며 놀다가, 내가 현관문을 여는 동시에 전광석화 같은 모션으로 제 자리를 찾고 동작을 멈추는 것은 아닐까, 이런 <토이스토리> 1편부터 4편까지 눈물 찍으며 관람한 입장다운 상상이 펼쳐진다.


이 때 바라본 풍경은 반갑기도 낯설기도 하다. 여행이라면 필요 없던 물건들이 살림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 일보 직전, 나는 조금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이미 달라졌다는 뜻, 여행 전과 후의 나는 나만 느낄지라도 엄연히 다른 ‘나’이다. 


밥 먹듯 여행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더 더 여행을 욕망하고 로망을 키운다. 여행에 최적화된 일상을 유지한다면 좋겠다. 돌아와 섰을 때 내가 살아야 할, 결국 내가 두고 간 살림(=삶)이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가벼움. 어쩌면 나는 내가 두고 떠날 삶이 무거웠던 것은 아닐까. 떠날 수 있는 삶만큼 두고 갈 삶도 조금 가벼웠으면 좋겠다. 애초부터 뭐가 그리 많지 않다면, 살림이든 인연이든, 떠나고 남고 다시 돌아오는 모든 경우의 무게가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져, 내 삶 자체가 가벼운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삶이어야 가볍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멀리 그리고 오래, 머물 수 있겠고 그러려면 애초부터 유지하고 있는 삶이 무겁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 내가 들고 다니는 짐도 가볍길 바라지만 내가 여행하는 동안 남아있을, 남아서 다시 <토이스토리>를 찍고 있을 나의 살림들도 많은 무게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벼운 여행, 가벼운 귀가, 가벼운 삶. 그리고 다시 가볍게 작별. 삶의 굽이굽이마다 마주치는 국면들을 그저 가볍게 대면하는 것, 어렵고 힘든 고비들도 무겁지 않게 맞이하고 넘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게 어렵다면 그땐 그저 가볍게 한번 울고 났으면 좋겠다.


정말, 현관 앞에서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나! 그렇다.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현관과 현관문은 알고 있겠지만 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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