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 해수욕장에 벌건 보름달이 떴다. 마치 전구를 켜놓은 듯 적막한 바다를 환하게 감싸 안았다. 바람이 스산하게 불다가 조용하게 멈추기를 반복했다. 봄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대신 거친 파도만 세차게 몰아쳤다. 4월 하순의 밤바다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한 동안 무심하게 지냈다. 언제부턴가, 어디서부턴가 찾아온 부재 의식이 서서히 나의 일상을 잠식했다. 매일 똑같이 방을 차지하는 이불과, 먹다 남은 커피잔과, 무질서하게 쌓인 옷가지, 한 입 배어물다가 이내 싫증 나서 방치해놓은 여러 분야의 책들까지. 나는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같은 옷을 입고 익숙한 동선의 길을 따라 걸으며, 어젯밤에 다짐한 계획의 절반만 달성하는 하루를 보냈다. 자기 전에 꿈꿨던 늦은 귀갓길의 충만함은 다음날 저녁이 되면 내내 결핍에 시달렸다. 나는 문득 처음으로 집이 비좁아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목소리는 음식점에서 혼자 메뉴를 주문하거나, 부모님과 전화하거나, 운전하면서 듣는 음악을 목청껏 따라 부를 때만 들려왔다. 공기 중에 퍼지는 말의 양은 줄었지만, 생각의 총량은 오히려 늘어났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면의 언어로 구조화되어 나는 나에게 계속 답이 없는 질문만 반복해댔다.
보이는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학생과 직장인의 여집합에 속한 인구의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나긴 외로움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고 따로 신분의 행세를 차린 적도 없는데 다채로웠던 친구들은 점점 비슷한 색깔의 일상으로 수렴되어 갔다. 작은 자극에도 민감해진 감수성의 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구태여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고, 어젯밤에 다짐한 계획에 어긋나는 신인(新人)의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것이 마치 내가 못나서인 마냥. 신입생이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휴학을 하면 무엇을 꼭 해봐야 하는 소위 '청년 생활백서'류의 획일화가 우리의 지난날을 지배했던 것처럼, 불과 몇 년 후에 삶의 선택의 폭이 좁아진 가장자리의 청년들은 그 실체 없는 클리셰에 다시 종속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세찬 파도에 고요한 달. 어색하게 조합된 자연을 바라보다 나는 그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롱.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보거나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을 인식할 때, 보통의 사람들은 그 대상을 희화화시키려고 한다. 백사장의 내가 바로 그랬다. 나는 누가 요구하지도 않은 단절의 벽을 둘러 버리고, 단조로운 무늬로 사는 것이 나의 신분에 넘치지 않을 삶이라고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과거에 나를 성장시킨 부조화의 치기가 더 이상 현재의 나와 크게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허전해진 나는 되려 그것을 가치 폄하했던 것이다. 아!! 나는 하마터면 습관적으로 퍼붓던 질시와 조롱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서로 다른 감정의 두 자연이 만나 최고의 경치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한동한 잡히지 않던 관념의 오류를 해소하고 나니 마음의 동요가 서서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사월의 달은 왜 그렇게 밝게 떠 있나. 텅 빈 백사장을 걸으며 그동안 벽에 가려 보지 못했던 삶의 소중한 것들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 둘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우리는 우리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보다 훨씬 더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하니 답은 더 간단해졌다. 영혼을 살찌우는 일. 작년 산티아고를 순례하고 다짐했던 외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일. 틈틈이 베이스 줄을 팅기는 일. 두꺼운 소설 속 좋아하는 문장을 따라 적는 일. 이제 모두 괜찮다. 앞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공감하고, 아침 햇살을 가득 안으며 오랫동안 걸어 다니고 싶다. 나는 취업과 과제만을 위한 하루가 아닌 찬란한 청춘의 순간을 위한 하루를 다짐했다. 송정해수욕장의 보름달이 아직 표면에 잔잔하게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