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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Dec 11. 2024

첫눈은 내렸는데…

이런 첫눈은 처음이다.


알고는 있었다.

밤새 눈이 오리라는 것은 전날부터 알고는 있었다. 수많은 뉴스와 일기예보에서 밤사이 서울에 첫눈이 내릴 수 있겠다는 예측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이 되며 방송사들의 메인뉴스에서는 눈의 양이 제법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가는데도 눈송이는 날리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앞 공원에는 아직 가로등이 꺼지지 않았고 그곳으로 눈 내리는 밤의 풍경이 그윽하여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올해 첫눈을 그렇게 감상하고픈 마음이 앞섰다. 하늘은 그런 설레는 마음을 그 시간 이후로도 쉽게 어루만져주질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이런 첫눈은 처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출근 알람이 울렸다. 미적미적 거리며 겨우 침대 밖으로 몸을 빼내던 평소와 달리 나름 꽤나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 작은방 베란다를 향해 직진했다. 과연 아파트 앞 공원에는 눈이 내렸을까? 창문 너머 아직 어두운 하늘 밑으로 새하얀 것들이 빛나고 있었다. 추위는 모르겠고 일단 창문을 시원히 열어 젖혔다. 그야말로 온 세상이 하얗게 바뀌었고 그 깨끗하고 하얀 풍경이 작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와 나를 온통 채웠다. 

이런 첫눈은 정말정말 처음이었다. 으레 첫눈이라고 하면 부슬부슬 내리는 척만 하다 끝나거나, 우리 동네에는 안 내렸는데 '서울에 공식적으로 첫눈이 내렸습니다.'라는 식의 뉴스 보도로만 접하는 식이었다. 눈을 제대로 만끽한다 해봐야 폴폴폴 내리다가 채 쌓이지도 못하고 이내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그간 내 기억에 자리 잡힌 첫눈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정말 이런 첫눈은 처음이었다. 밤새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이 길 위에, 나무 위에, 자동차 위에 참으로 소복하고도 예쁘고 탐스럽게 눈이 쌓여있는 게 아닌가? 그간 첫눈이라는 이미지를 깎아 먹은 걸 제 스스로 복구라도 하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눈 풍경이 세상 가득 펼쳐져 있었다. 


의외의 일이었다.

하얀 눈에 대한 낭만이 폭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출근길은 걱정스러워 일찍 길에 나섰고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는 그 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아름다움을 만났다. 단풍 위에 소복하게 내린 눈송이라니~!! 당연스레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름다웠다. 낯설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이런 의외의 풍경을 만나게 될 줄이야! 바알간 케이크 장식 위에 하얗게 내려앉은 달콤한 슈가파우터 같았다. 간혹 제주도에서 늦겨울이나 초봄에 검붉게 피어난 동백꽃을 감싸 안은 함박눈은 본 적이 있지만 가을 단풍 위에 소복하게 쌓인 함박눈은 정말정말 의외의 풍경이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이라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 사진 파일을 노트북으로 옮기고 바탕화면을 저 사진으로 바꾸었다. 넋 놓고 그 풍경에 달콤하게 빠져들다가 불현듯 안타까움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니 단풍잎들은 아직 다 붉은빛으로 제 색깔을 바꾸지도 못하고 있었다. 노오란 빛이 남아 있었고, 늦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제 모습을 갖추려 애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나 많은 눈이 온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붉은빛을 내고 그 붉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었을 텐데 벌써 겨울이라니……. 가을을 채 누리지도 못했는데 겨울이 너무 깊숙이 찾아와 버린 것이었다. 무더웠던 여름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아니면 성급한 겨울이 너무 일찍 찾아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은 가을로서의 의미를 드러낸 시간이 너무 짧아진 것이었다. 단풍 위의 흰 함박눈이라는 낯설었던 그 풍경은 어쩌면 이제부터는 낯설지 않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건 사고다. 이것은 분명히 사고이다. 여름과 겨울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서 충돌했고 그 사이에 그 둘만큼이나 존재감을 갖고 있던 가을이 찌그러지고 만 사고다. 두 극단이 충돌하며 중간에 있던 아름다움이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과 섞여 물들어버리는 사고이다.


계절의 무지개를 꿈꾼다.

비와 햇살이 만나는 날에는 간혹 무지개가 뜬다. 그 무지개를 두고 문화권 별로 색의 종류를 다 다르게 말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이기도 하고 오색찬란한 무지개이기도 하다. 그렇게 각기 다른 것은 무지개의 색깔은 여러 색깔이 그러데이션으로 연속되어 있기 때문일 게다. 빨강과 주황의 정확한 경계선은 없다. 푸른색이었다가 노란색을 거쳐 주황빛으로 빛나다가 빨간색으로 이어진다. 마치 단풍이 그리 물들어가듯이.

지나친 관념화는 편을 나누게 된다.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라는 질문 사이에 반드시 '가을은?'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극과 극의 계절 사이에서 나름 자신의 빛깔을 내는 계절도 분명히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계절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계절 또한 무지개처럼 연속적인 것이니 양극단을 끌어들이며 관념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다 사고가 난다. 여름, 겨울 말고 봄과 가을을 사랑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 두 계절을 무지개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첫눈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가을의 빛깔도 맘껏 빛날 수 있기를~


                                          - 2024 첫눈 내린 날에




일찍 피어나는 꽃이 일찍 지듯이

일찍 물든 단풍잎은 일찍 낙엽이 되듯이

겨울이 일찍 밀려들어오면 그만큼 빠르게 끝날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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