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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롱 Feb 27. 2022

내가 사랑하는 독일의 봄꽃들

언 땅과 마음을 녹이는 들꽃 요정 삼총사

        고백하건데 나는 꽃다발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이라고는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딱히 쓸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받을 때 잠깐만 볼만하지 금새 시들어 쓰레기통에 쳐박힐게 분명한데 뭣하러 이딴데 돈을 쓰나 싶었다. 그렇다고  뿌리가 살아있는 화분에 담긴 꽃선물을 좋아했냐. 그것도 아니었다. 무관심에 말라 죽이거나, 과하게 준 물로 뿌리를 썩히거나. 여하튼 꽃이 좋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간혹 드라마에서 보던 것 처럼, 꽃은 시간 많고 돈 많은 사모님들이나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랬던 나, 지금은 꽃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꽃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바로 지독한 독일 겨울. 마음도 하늘도 삭막하고 우중충한 나날이 이어지던 추운 겨울 날. 매주 화요일마다 광장에 서는 장터에서 갖가지 종류의 꽃을 팔고 있는 가판대를 보았다. 흑백 티비같은 쟂빛 세상에서 꽃들만은 HD 풀 칼러 티비에서 튀어 나온 듯 각자의 고운 자태와 휘황찬란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그 가판대로 가서 난생 처음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 꽃을 샀다. 이름도 모르는 몇가지 종류의 빨강, 하양, 보라색 꽃이 섞여 있는 다발이었다. 계산을 하고 생애 첫 내돈내산 꽃다발을 건네 받는 순간, 나도 컬러 티비 세상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사람들이 이래서 꽃을 좋아하는건가… 어렴풋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몸과 마음이 축축 쳐지는 독일 겨울 내내 나는 꽃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꽃 물가가 저렴해 평균 3-5유로 (한화로 4천원에서 7천원 정도)면 제법 집안을 밝힐 수 있는 꽃 한 다발을 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정도면 아주 값싸고 휼륭한 가성비 갑 테라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유달리 기분이 쳐진다 싶으면 샛노란 튤립을 사다가 '꽃멍'을 때리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수선한 날이면 붉은 장미 다발에 수북히 붙어있는 잎파리를 조심조심 솎아 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이들의 이쁜짓에, 남편의 다정한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좋을 땐 샤랄라한 핑크빛 꽃이 감도는 백합으로 온 집안에 행복의 향기를 채웠다.


        마트와 장에서 모셔온 꽃다발도 훌륭하지만 이보다도 더 강력한 효과를 가진 들꽃들이 있다. 겨울은 가고 이제 봄이 가까이 왔다고 알려주는 아주 반가운 꽃, 힘든 겨울 잘 버티느라 수고 많았다고 웃어주는 꽃, 그러니 이제 너도 나처럼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라고 용기를 주는 꽃. 말 그대로 꽃 요정 삼총사들이다. 요정이 아니고서야 사람 마음을 이렇게 바꿔 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슈네글록쉔: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설강화라는 이름보다 눈꽃방울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슈네글록쉔 (Schneeglöckchen) - 한국에서는 설강화라고 불리는 독일의 슈네글록쉔은 제일 먼저 봄 소식을 가져다 주는 꽃이다.  흡사 제비꽃과 비슷한 비주얼을 가진 여리여리한 풀꽃은 가끔은 눈이 채 다 녹지 않은 언 땅을 뚫고 피어나기도 한다. 슈네(Schnee)는 눈, 글록쉔(Glöckchen)은 작은 종 혹은 방울이라는 뜻인데, 누구인지는 몰라도 작명 하나 기가 막히게 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10센티 정도의 여린 줄기 끝에 달린 새하얀 꽃이 찬바람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어디선가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이리도 작고 여린 꽃이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난 것을 보면 대견하다 못해 경외심마저 든다. '작은 너도 버텨냈는데 나도 좀 만 더 버텨야지' 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 나만 그런게 아닌가보다.  슈테글록쉔의 꽃말이 '희망, 위안' 인 것을 보면.



내 앞에 펼쳐진 크로쿠스 꽃길

크로쿠스 (Krokus) –  밍기적 거리며 늑장을 부리는 겨울을 재촉해서 쫓아내려는 듯 서둘러 봄을 알리는 크로쿠스. 한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에 가깝게 크로커스라고 부르는 듯 하다. 슈네글록쉔이 청초하고 고고한 느낌이라면, 크로쿠스는 좀 더 앙증맞고 귀여운 느낌이랄까? 하양, 노랑, 보라빛은 어릴적 학교 화단에서 많이 보던 팬지를 떠올리게 한다. 매우 작은 키에 비해 꽃송이가 제법 큰 편인데,  꽃이 활짝 피면 아래 있는 잎파리와 땅을 다 가려버릴 정도이다. 게다가 번식력이 엄청난지 홀로 피어있는 법 없이 늘 무리지어 피어있다.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날씨지만 한 줌 햇빛이 땅을 간지럽히면 크로쿠스는 손에 손을 잡고 일어나 온 땅을 뒤덮는다. 하양, 노랑, 보라빛으로 물든 꽃 카페트 앞에 서면, 왠지 올 봄에는 나 꽃길만 걸을 것 같은 기쁨이 일렁인다. 그래서일까? 크로쿠스의 꽃말은 '믿는 기쁨, 청춘의 기쁨'


나 좀 봐요!라며 예쁨을 한껏 뽐내는 오스터글록켄

오스터글록켄 (Osterglocken) - 부활절이라는 뜻의 오스터 (Oster)와, 종이라는 뜻의 글록켄(Glocken)이 합쳐진 이름처럼 봄이 제법 성큼 들어 섰을 때, 눈부신 노란빛을 뿜어내는 꽃이다. 슈네글록쉔과 크로쿠스와 달리 수선화라는 이름이 익숙한만큼 분명 한국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딱히 예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연못에 비친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가 상사병으로 죽은 후, 그의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꽃이 바로 수선화. 뭐 그만큼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겠지만, 뭐가 그리도 곱다는 것인지 전혀 공감하지 못했는데….. 독일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화단과 공원 들판 구석구석에 피어있는 오스터글록켄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슈네글록쉔과 크로쿠스가 땅에 붙어 있다시피 한 반면 제법 큰 키 (30-60센티)를 뽐내는 오스터글록켄. 쭉 뻗은 초록 줄기 끝에 달린 크고 노란 꽃은 또 얼마나 시선을 끄는지. 수줍은 모습 하나 없이 화알짝 핀 꽃은 ‘내가 이렇게 예쁜데, 나를 안 보고서야 배길 수 있겠어?‘ 라고 말하는 듯 하다.  꽃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오스터글록쉔은 아마 <내가 제일 잘 나가> 를 부를 것이다.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나도 꽃을 따라 괜히 고개를 쳐들고 발걸음을 당당히 하게 된다.  '자기애, 자존심, 고결'이라는 꽃말을 가진 오스터글록켄을 닮고 싶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보살펴주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도 않고

투정 부리지도 않고

저 자체로 아름답게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꽃들에게서

겸손과 침묵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됩니다.

                    정목스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정목 스님 말씀처럼 독일의 봄꽃들은 나에게 겸손과 침묵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슈네글록쉔, 크로쿠스, 오스터글록켄은 일년의 대부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작은 알뿌리에 자신만의 에너지를 모으고 또 모았을것이다. 알아봐주는 이 없어도, 보살펴주는 이 없어도 투정하거나 서운해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면서. 마침내 자신의 시간이 되었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온 에너지를 쏟아 최고의 꽃을 피우는 작은 생명체를 보면 그 대단한 힘에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 나도 조용히 버티면서 내 힘을 키워야지.

이러저러한 처지를 탓하지 않고,

당장의 보상이나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것을 바라지 말고,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면의 힘을 키우는데 정성을 쏟는다면,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꽃을 피워낼 수 있을꺼야.

내 인생의 봄날을 알리는 어여쁜 꽃을.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G4Kcq4KWFVM

https://unsplash.com/photos/chqL2GrLkEY

https://unsplash.com/photos/cLXbNhLeJ9k

https://unsplash.com/photos/vkjXpsw0O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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