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나에게만은 비가 내렸다.
박수봉 작가의 그림을 보며 기다리던 '봄소식'이 드디어 도착했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계속 귓가에 맴돌아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이 신기하지. 마지막 그림에 덧입혀있던 음악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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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비' Spring Rain, 장범준
쨍한 하루였지만 내게만은 비가 내렸다. 장범준 덕분에 비를 쫄딱 맞고 머리부터 흠뻑 젖어 밤잠까지 못 이룬다고 하면 봄날의 개가 짖는다고 하려나? 그러나 내게만은 오늘 하루 정말로 비가 내렸고 나는 한참이나 흔들리는 차창 밖을 내다보고 앉았다가 한참이나 거리를 걸었다가 한참이나 흐르는 강물에 턱을 괴었다가 결국에는 한참이나 멍하니 쌓이고 쌓인 오래된 감정들의 밤바다에 잠겼다.
괜스레 화면에 나오는 그의 인터뷰까지 보았나 보다. 봄 비를 맞는 듯 주루루 루루루 흐르는 노래를 가만히 듣고만 있으면 되었을 것을. 여하튼 덕분에 못내 가라앉았다. 한참을 가라앉았다. 오래된 음악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오래된 음악들로 아득히오래된 날들로 돌아가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래된 나와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때로는 너무도 무수히 많은 '오래된 나'들을 만나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랬다. 그런 날이었다. 수많은 '오래된 음악'과 '오래된 날'들과 '오래된 나'들과 그 모든 오래된 나를 가득 매우던 '오래된 생각'들의 비를 맞았다. 흠뻑 이나 젖어버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갈 수 있는 곳은 무수히 많았지만 가야 할 곳은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떠나는 여행을 즐겼다. 도시의 낯선 구석구석을 홀로 거니는 것을 즐겼다. 두 시간을 꼬박 걸은 날들도 있었고 그 이상을 걸은 날들도 있었다. 그렇게 나의 주변을 시작해 집 앞에서 출발하는 웬만한 버스들의 노선을 외워내곤 했고, 집에서 한 시간이 걸리는 곳들의 구석구석도 낱낱이 알아낼 때가 많았다.
그러한 날들이 오래였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의 반절은 그렇게 많은 곳들에서 '나 자신'과의 이야기들을 쌓았었다. 그 구비구비 오래된 날의, 그 순간들의 '나 자신'들을 토해내 구석구석에 흩뿌려 두었었다. 어쩌면 나는 이 커다란 도시의 곳곳에 '나 자신'을 지나치게 많이 뿌려둔 것인지도 몰랐다. 그대로 아름다운 것들도, 가만히 흙으로 덮어두어 아름다운 것들도, 못내 너무 아름다워 그에 두텁게 쌓여 앉은 오래된 흙 위를 밟아내지 못할 것들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가야 할 곳을 몰랐다. 그 많은 곳들에 뒤덮인 '오래된 나'들이 밀려와 머릿속이 아득해졌기 때문이었다.
장범준의 노래는 마치 그 시간이 흘러 쌓이고 쌓인, 내가 가만히 오래된 나들을 덮어둔 '빛바랜 흙'을 마구 파헤쳐내는 것 같았다. 이유는 없었다. 가사에 심취하는 나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그의 기타 선율과 떨리는 목소리가 나의 흙을 마구 헤집어내는 것 같았다.
_그러고 보니 처음 그의 벚꽃이 필 때가 바로 그 해였구나.
그렇게 가장 여린 맨땅이 드러났다. 그 아래 흩뿌려 있던 오래된 나 자신의 조각들이 반짝 빛이 났다. 깨진 유리와 같이 빛이 났다. 빛이 났지만 날카로웠다. 물론 그는 나를 찌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동안 잊고 있던 자잘한 유리 조각들이 봄 햇살을 받아 오래된 빛을 반사해 냈고 나는 그 오래된 빛깔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느라 오래도록 아득해졌을 뿐이다. 나의 머릿속이 가득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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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또 하나의 선곡은 연남동 덤앤더머의 '애타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