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멜버른, 다시 돌아온 오래된 장소.
가끔은 그런 밤이 있다. 너무 평온하고 포근하고 행복해서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이 밤이 아주 오래도록 기억되리라는 것을 깨닫는 밤. 마음의 저 밑바닥까지 솔직해지는 그런 밤. 맨 정신으로도 얼큰하게 취한 듯 웃어대는 그런 밤.
몽환적인 어제의 밤이 바로 그러했다. 다시 돌아온 오래된 장소에서의 오래된 사람과의 어젯밤이 바로 그러했다. 몇 안 되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젊은 순간 중의 하나였다.
나는 지금 산타 할아버지가 반바지를 입는 남반구에 날아와 있다. 그러나 따뜻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내게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바로 일 년 하고도 반 전의 나 역시 오늘의 이 반대의 계절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방인이던 나의 경험은 때로는 아팠으나 그 달콤한 순간들의 짜릿함에 오래 두고 그리운 애틋한 것이었으며 한국에 돌아온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달콤한 속삭임으로 한국에서 다잡은 나의 두 주먹을 스르르 풀리게 만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삶이란 알 수 없는 것. 어쩌다 보니 나는 두 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적절한 운이 따랐고 나 또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신없는 사 개월이 지났고 어느새 나는 일 년 반 만에 사무치게 그리던 멜버른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 모든 것들은 마치 어제도 그랬다는 듯이 순진한 얼굴로 제자리에 놓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애초에 내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과 같이. 또한 나도 내가 오늘에 있는 것인지 일 년 반 전의 날에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무언가 들이 달랐다. 사람들, 장소들, 그리고 나도 아주 사소하게 달라져 있었다. 괜스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서글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란 것은 때론 대수롭지 않다가도 때로는 무거웠고 이따금 야속했다. 어쩌면 내 마음의 한 파편은 보다 젊고 찬란했던 과거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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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 내가 떠나기 전과 같았다. 나의 매거진에 종종 등장하던 인물들도 다시 만났다. 그렇게 다시는 마주하지 않으리라 믿으며 '완벽한 안녕'을 고했던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고 별생각 없이 즐거웠으나 다시 찾은 라운지의 내가 가장 사랑하던 움푹 꺼진 '껴안는 소파'에 앉은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말했다. 두 번째로 이방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모든 것들에 완벽한 안녕을 고했다. 그리곤 그 모든 나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의 상자에 차곡차곡 눌러 담아 예쁘게 포장했다. 아마 빨간 리본 하나도 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 한 귀퉁이의 서랍을 열어 가만히 담은 다음 서랍장을 오래도록 닫아 두었다. 선물이 빛을 바랐을 염려는 없었다. 나의 서랍장은 든든하게 예쁜 선물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의 돌아옴은 마치 급작스럽게 그 선물을 꺼내어 예쁜 포장을 마구잡이로 헤집은 다음 선물들을 모두 꺼내어 흩어낸 느낌이었다.
왜인지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다.
다시 돌아온 나는 일 년 반 사이 꽤나 자라 있었다. 지난 호주에서의 나는 언제나 바랐다. 나 자신이 보다 분명한 나 자신일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보다 당당해질 수 있기를. 두 번째의 오늘, 나는 나에 대해서 더욱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다 꺼내 놓을 수 있었고 농담도 던질 수 있었다. 또 다른 불편함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돌이켜 나는 왜 그토록 조바심을 내거나 혹은 조심스러웠을까. 그저 뱉어내면 되었을 것을. 그러나 이내 후회를 거두었다.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가진 나는 행운아였다. 또한 그 두 번째는 두 번째이기에 완벽했다. 완벽하게 달콤했다.
비록 내가 가졌던 익숙한 외로움과 혼란과 이방인의 삶의 고단함은 여전할 것이다. 아마 글로써 풀어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익숙한 행복이 더욱 커다라리라. 더욱 묵직하고 포근하리라.
삶은 계속된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또한 나의 새로운 모험도 시작되었다.
나의 두 번째 멜버른이 비로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