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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May 24. 2024

목욕탕에서 아는 얼굴을 만날 때

아는 척할까 말까



목욕할 때가 즐겁다




딸아이를 설득해 목욕탕에 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다 같이 목욕탕에 갔었다. 그러던 중 사춘기 딸아이의 선언 "저는 이제 목욕탕에 가지 않겠어요"라는 말 한마디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아내만 목욕탕에 다니고 나랑 딸아이는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다 어제오후 나는 대뜸 딸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딸아! 아빠랑 저녁에 짜장면 먹고 목욕탕에 가자. 한 달에 한 번은 때 밀어야 깨끗행." 깨끗해,라고 썼다가 깨끗행으로 바꿨다. 자칫 명령처럼 보일까 봐서... 그럼에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퇴근 후 딸아이의 수학학원으로 데리러 갔다. (목요일에는 학원 차량이 운행하지 않아 데리러 간다) 딸아이가 차에 타자마자 나는 서둘러 "딸! 아빠가 짜파게티 끓여줄 테니 목욕탕에 가자"라고 말했다. 다행히 딸은 별말이 없다. 무언의 침묵은 긍정을 뜻한다. 나는 덧붙여 말했다. "아빠도 중학교 때 한동안 목욕탕에 가지 않은 적이 있는데 그때 피부에 종기가 나서 힘들었어. 그 흉터가 아직 남았다고." 나는 혹시라도 딸아이가 안 간다고 할까 봐 무리한 설정으로 목욕탕에 가야 함을 열심히 떠들었다. "종기 나면 큰일 난다고!" 아내로부터 톡이 왔다. "애가 목욕탕 간대?" 나는 "예스, 간대"라며 기쁨의 답을 보냈다. 딸아이에게 물으니 짜파게티 3개를 끓이라고 해 3개를 끓여서 반개는 내 몫, 2개 반은 딸아이 몫으로 줬다. 딸아이는 입가에 잔뜩 시커먼 것을 묻히면서 박박 살뜰히 긁어먹었다.   



오래간만에 가족의 목욕 나들이.



옷을 다 벗고 탕에 들어서서야 깨달았다. 이태리타월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다시 옷장으로 나가 살까? 하다가 그냥 쓰레기통을 뒤졌다. 다행히 멀쩡해 보이는 타월이 있었다. 비누로 깨끗이 씻고 자리에 뒀다. 온탕에 들어가 고개 드는데 건너편 냉탕에서 나오는 아저씨가 슬쩍 내쪽을 돌아봤다. 순간 고등학교 친군가? 싶었다. 아무래도 친구 같았다. 얼굴 본 지는 가만 따져보니 십수 년 전인데 그때도 목욕탕이었다. 그 목욕탕은 진주 시내 롯데 인벤스 건물에 있는 곳이었는데, 녀석 이 동네로 이사 왔나? 근데 뭐 저리 아저씨 같지? 친구는 중년의 신사처럼 어슬렁어슬렁 걸어 온탕을 지나갔다. 아는 척을 해? 말아? 갈등했다. 그러다 이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숙이고는 다른 곳을 쳐다보는 척했다. 온탕에서 녀석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려서 고개마저 반대로 돌려 벽을 봤다. 녀석은 곧 지나쳐갔다. 그리고 곧 녀석은 다시 온탕 옆을 지나 사우나로 갔다. 배가 나오고 살은 찌고 다리는 얇고 걸음걸이는 뒤뚱뒤뚱. 나도 저렇겠지 싶었다. 확실히 나도 저렇게나 살이 쪘다. 나이 듦의 살. 중년의 살이다. 똑같이 먹고 똑같이 움직이는데 살이 쪘다. 어쩌면 덜 먹고 더 많이 움직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덜 먹고 더 많이 움직이지 못한 죄악이 죄책감으로 남는다. 죄책감으로 나는 고개 숙이고 돌린다. 자신이 없었다. 친구도 힐끔 나를 보다가 갈등하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 나이 듦의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내 상대를 보고 나를 보면서 선뜻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나도 사우나로 갔다. 갔다가 냉탕으로 갔다가 열탕으로 들어갔다. 열탕에 들어가니 친구는 냉탕에 들어갔다. 열탕과 냉탕은 서로 붙어있다. 내가 앉아서 보는 방향이 냉탕으로 향하고, 친구는 냉탕에서 내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제는 고개 돌릴 수도 없는 거리와 타이밍. 나는 차라리 눈을 감기로 했다. 눈 감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열탕에서 마지막 때를 불리리라 하면서, 그러다 눈을 떴다. 뜨니 친구가 냉탕에서 내쪽을 보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구나. 걸렸구나. 괜히 피했구나. 


여기서 눈이 마주쳤다는 건 상상이다. 

열탕 안에 깊숙이 들어가 목만 드러내고 있을 때 녀석이 다가올 때 눈감은 나의 상상. 눈감은 내 얼굴을 보고 녀석은 웃다가 문득 눈뜨지 않은 나를 인식해 냉탕에서 나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는 척하지 못했구나. 분명 녀석이 맞는 거 같았는데. 십수 년 전 목욕탕에서 만났던 친구.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던 삼십 대의 아빠. 그에 반해 나는 아들이 없어 홀로 목욕하는 아빠.  


아내는 몸살기에 힘이 없어서 목욕탕 세신 아주머니에게 딸아이를 맡겼다고 했다. 딸아이가 때 밀고 저울에 올라가 줄어든 몸무게에 만족했다고 한다. "거봐라, 너 때 밀어서 아마 2킬로그램은 줄었을 거야"라고 덕담했다. "때 민 보람이 있네, 짜파게티 두 개 반을 먹어도 줄었잖아"라고 하니 다 같이 와하하 웃었다.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시기에 적절한 멘트였다. 


여름에 들어서서 목욕탕에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너무 없어서 외려 쾌적하니 좋다. 선뜻 손들어 인사하지 못해도 친구를 보니 좋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만 변하는 게 아니구나. 친구는 혼자 온듯했다. 다 컸겠지. 설득하지 못했구나. 좁은 동네다. 언제고 부딪치는 거리. 동네서 다시 만난다면 까짓 얼마든 손 들어 인사하리. 


세월 참 빠르다. 


 

그대 나를 보아도 몰라요 고개 돌려 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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