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명에서 떠나온 지... 곤명을 떠날 즈음부터 그랬지만 떠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여유가 없어 차분히 이별을 준비하거나 가다듬지 못했다. 떠나기도 전에 새로운 곳에 적응할 생각부터 했다. 적응하고 나서 이별을 되새기려 했다. 새로운 곳 걱정에 나중에 하면 되겠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착각. 기억이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가는 시기. 어느덧 중년. 어제저녁 뭐 먹었는지도 한참을 골몰해야 떠오르는 신세. 그것도 운이 좋아야 반짝 떠오르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두 달간 잊고 살았던 곤명. 나는 곤명에 대해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곤명에서 2년 반을 머물렀다. 2년 반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지냈나. 무얼 먹고 지냈나. 경남 사천시 곤명면에서 특히 내가 있던 곳은 "완사"라고 불리는 마을. 완사는 옛 지명이다. 옛 이름이지만 아직도 곤명보다는 완사라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너 어디 가니? 응, 나 완사 간다, 라고 말하지 곤명 간다, 라는 말은 거의 듣지 못했다. 완사는 오래전부터 가끔씩 들렀던 곳이다. 동네가 크지 않지만 아기자기하다. 수몰된 마을에서 한꺼번에 이주해 직사각으로 조성된 마을.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삼십 분이면 족하다. 5일에 한 번씩 서는 오일장이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장. 시장뿐 아니라 식당도 많다. 완사에서 유명한 것은 완사역과 식육식당이다. 식육식당은 소고기국밥과 육회비빔밥이 특히 유명하다. 나는 완사를 알기 전 가끔 국밥을 먹으러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완사를 매일 다니고부터는 잘 먹지 않게 되었다. 나의 반골적인 기질 때문인지 남들이 잘 모르면서 허름한 곳을 찾으려 하는 특성. 완사 바깥의 사람들이 모르는 곳. 동시에 완사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 그런 식당을 찾다가 라면을 파는 가게에 가게 되었다. 라면집 간판 위에는 전자 간판이 번쩍거리는데 늘 "영업 중"이라는 표시가 흐른다. 전자간판이 무색하게 실내는 단출하다. 테이블은 겨우 세 개. 나는 홀로 들어가 라면과 김밥을 시켰다. 라면에는 계란이 보기 좋게 풀어져 있다. 할머니가 끓여주는 라면. 김치는 쉰 김치다. 라면 두 젓가락을 입에 넣고 김치 한 조각을 집는다. 짠 내가 입안을 마비시킨다. 후루룩 후루룩 라면을 마구 집어넣는다. 라면이 김치의 독성을 중화시킨다. 라면국물 한 모금을 마신다. 라면은 분식을 넘어서 부단히 오랜 세월 갈고닦은 전통의 조리에 경건함까지 국물에 묻어난다. 김밥이 나온다. 김밥은 무척이나 정갈하여 깨끗한 단면이 눈에 띌 정도다. 깨끗한 김밥 하나를 먹고 구수한 라면 국물을 쭉 들이켠다. 김밥과 라면이 어우러진다. 둘의 조화에 나는 포만감을 느낀다. 이것이구나. 밖에서 사 먹는 라면과 김밥의 맛. 하나만 먹으면 허전하고 둘 다 먹으면 배부르다. 나는 하나만 먹으려 들어왔지만 들어와서는 늘 둘을 시킨다. 그러고선 김밥 한두 개를 남긴다. 라면 국물도 조금 남긴다. 남김을 보며 안심한다. 포식했지만 완전히 포식하지는 않았노라. 남은 김밥과 국물을 보면서 아쉬움을 삼킨다. 할머니에게 돈을 건네니 "고맙습니다"라는 인사가 돌아온다. 식당을 나서 완사 한 바퀴를 돈다. 너무 많이 먹었구나 죄책감이 들어 빠른 걸음으로 두 바퀴째 걷는다.
라면집 건너에는 수제비집이 있다.
나는 라면집과 수제비집 사이에서 참 많은 갈등을 했다. 라면을 먹을까 아니면 수제비를 먹을까. 라면은 김밥과의 조화가 가능하다. 반면 수제비는 온전히 수제비 하나로 포만감과 만족감을 준다. 라면김밥과 수제비의 싸움. 어떤 걸 먹을까. 같이 먹을 수는 없다. 날씨가 춥나? 차가운 바람이 부나? 부는구나. 그래, 지금이 아니면 언제 수제비를 먹으랴. 오늘은 수제비를 먹고 다음에 라면을 먹자. 이런 결론이 나오는 날이면 수제비집으로 갔다. 수제비집은 더 단출하다. 완사 시장 건물 한쪽에 있다. 시장 건물은 오래되었다. 오일장에만 영업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들어가면 아주머니 두 분이 얘기하다가 화들짝 놀라 어서 오세요 라고 했다. 들어설 때마다 그랬다. 손님이 올 시간이 아닌데 하는 표정. 나는 일부러 손님이 많지 않을 시간에 간다. 가서 수제비를 시킨다. 수제비에는 새우 두 마리가 꼭 들어간다. 손으로 까먹는다. 수제비에는 칼국수도 들어가 있다. 처음에는 젓가락으로 먹다가 칼국수를 다 먹을 즈음 숟가락으로 수제비를 떠먹는다. 사이사이 국물도 먹는다. 국물은 깊고 진해서 이게 시장의 수제비구나 하는 감탄을 준다. 젓가락과 숟가락이 입에 닿을 때마다 감탄을 내뱉는다. 참 맛있구나. 먹어도 먹어도 계속 먹고 싶구나. 쫀득하게 씹히는 수제비의 식감. 넓덕하게 펼쳐진 거 좁작하게 말린 거 여러 형태 모두 나름의 먹는 재미가 있다. 수제비를 씹는 거와 국물을 흡입할 때의 식감이 비슷하다. 씹어도 한두 번만 씹고 후루룩 삼키고 흡입해도 씹는 거와 같은 진한 점성에 수제비를 느끼며 목구멍으로 넘긴다. 이런저런 건더기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이어지는 숟가락질. 처음엔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바닥이 보이는 마법. 따뜻한 기운이 아랫배를 감싼다. 이제 다 먹었구나. 아 든든하다. 더 먹고 싶은 아쉬움을 무릅쓰고 일어나 인사한다. 잘 먹었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뒤이어 온 손님들이 이제 막 수제비 그릇을 받아 드는 것을 보며 야릇한 부러움을 느낀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온다. 이게 완사의 수제비다.
완사의 라면집과 수제비집에 가본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나는 완사의 유명한 식당과 안 유명한 식당 모두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떠나오면 떠나온 곳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닐까. 떠났다가 다시금 가볼 때 생기는 뭉클한 마음. 뭉클한 입으로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맛. 완사에서 머무르지 않았다면 모르는 곳. 작은 라면집과 수제비집 덕에 무사히 지낸 시간. 할머니, 라면하나랑 김밥 한 줄이요. 아이고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먹고 싶어서 왔어요. 김치 좀 더 주세요. 아주머니, 수제비 하나요. 이제 두 달이 세 달 되고 몇 년이 되겠지만 오래간만에 찾아가는 식당이 두 곳이나 생겨났다. 여기 라면, 수제비 나왔어요. 네~~ 젓가락을 집어드는 순간, 나는 완사에 왔다. 잘 먹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