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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만세 May 07. 2022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

20대 초반 자취를 시작한 뒤로는 쭉 TV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 정보를 라디오를 통해 얻습니다. 라디오와 함께 선명하게 기억된 인생의 순간이 여럿 있고요. 오늘이 어제보다 추운지, 더운지, 비가 오는지, 미세먼지가 심하지는 않은지. 날씨 정보에 언제나 빠삭한 편이죠. 유명인들의 목소리만 알고 얼굴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도 좀 생겼어요. 이런 특징이 모두 라디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니. 조금 과장하면 라디오가 나를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라디오가 없었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을 거예요.


그럼에도 ‘왜 라디오가 좋은가’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공기가 너무 좋다’고 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에게 라디오란 그런 것이었어요. 늘 있는 것, 내가 속한 환경 같은 것.

라디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거든요. 다음날에도 그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그 목소리가 흘러나오죠.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알아채지 못했던 거예요. 나의 리듬이 없어서 고민이라고는 했지만, 나의 가장 오랜 습관이 라디오였다는 것을요.


라디오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2005년의 노트. 기억하고 싶은 곡이 나올 때마다 받아 적다보니..


거의 온종일 라디오를 틀어두지만, 단연코 가장 좋아하는 방송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입니다. 중학생 때 처음 차 안에서 ‘배캠’을 접했고, 고3 때 미술 학원에서 그림 그리면서 본격 청취자가 됐어요. 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야근이 일상이 되어버렸을 때도, 하고 싶은 거 하겠다고 뛰쳐나와 백수로 지내던 때도, 세상이 어지러워 MBC 전체가 파업했을 때도, 즐겨 듣던 라디오 DJ들이 바뀌고 다시 정착할 만한 채널을 찾아 떠돌던 때도, 오후 6시가 되면 어김없이 배캠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누가 물었을 때, 제가 떠올린 건 노을과 배캠이었어요. 저에게 그 조합은 '완벽한 시간'의 상징 같은 것이거든요. 백수 시절, 해질녘에 온통 빨갛게 물든 방 안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면서 뭐라도 작업하는 시간을 저는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를 바랐고, 밖에 나가더라도 6시 전에는 꼭 집에 돌아오려고 했다니까요. 요즘처럼 배캠의 시간에도 아직 지지 않고 남아있는 해를 볼 때면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아, 여름이 오고 있구나.


배철수 아저씨는 ‘TV는 욕하면서 보기도 하는데, 라디오 듣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편’이라고 했어요. 언젠가 배캠에 대타 DJ로 왔던 신해철 씨는 ‘라디오에서 가장 좋은 것은 피드백’이라고 했죠. 피드백이란 일종의 격려라고요. 비판적인 피드백마저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어줍잖은 칭찬보다 강력한 응원이 되어 주기도 하잖아요.

라디오는 매일 만나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어요. DJ는 매일매일 자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진짜가 아니라면 금세 들통나 버리거든요. 그래서인지 라디오에는 ‘진짜’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감각, 라디오 뒤에는 분명 사람이 있다는 감각 말이에요. 저는 라디오를 통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상황이 있는지 알게 됐어요. 일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도 배웠고요.


퀸의 <Radio Ga Ga>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And everything I had to know I heard it on my radio
내가 알아야 했던 모든 것은 다 라디오를 통해 들었어
Let's hope you never leave old friend
제발 떠나지 않길 바래 오랜 친구여

놀랍지 않나요? 80년대에도 TV에 자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보이는 라디오를 안타까워하는 곡들이 나왔는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라디오는 여전히 잘 살아있다는 것이요.


저도 라디오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많은 것들을 알려줘서, 좋은 순간들을 남겨줘서, 어디에 있더라도 안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요. 덕분에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도, 새벽에 작업하는 시간도 다 좋았다고요. <Radio GaGa>의 마지막 소절로 저의 마음을 대신합니다. 

Radio, someone still loves you.



전설적인 공연, LIVE AID에서의 라이브로 <Radio Ga Ga>를 들어보세요





흠, 이거 흥미로운데?라고 느낄 법한 콘텐츠를 격주로 전달하는 흠터레터의 <완전진짜너무진심> 코너를 브런치에도 옮깁니다. 흠터레터를 구독하시면 다른 꼭지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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