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히르 May 28. 2017

#17, 傷ついた心をいやす思いやり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배려심 (for #38)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흐림

이와모토지(岩本寺) - 31km - 우미보즈호텔(海坊主ホテル)


토사시미즈시의 아시즈리(足摺)를 향한 가장 긴 여정~ 

이와모토지를 출발해서 아시즈리까지 오늘은 3분의 1까지 걷는 걸로...

37번 이와모토지에서 38번 곤고후쿠지(金剛福寺)까지는 86.5킬로란다.

86.5킬로, 언뜻 가늠이 되지 않는 거리감인데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천안까지 가는 거리 정도거나 어쩜 그보다 살짝 멀 수도 있을게다. 

걸어서는 3일을 꼬박 가야 하는 거리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이제는 이 길 자체를 즐기기로 했고, 무엇보다 길동무도 생겼고, 곤고후쿠지는 시코쿠의 최남단 아시즈리에 위치하므로 남쪽으로 남쪽으로 땅끝마을을 찾아간다는 설렘도 있다.


어제 약속한대로 7시에 이와모토지에서 사코상을 만난다.

56번 도로를 따라 두시간을 걷고나니 살짝 등산로가 이어진다. 어제와 거의 같은 등산로다. 사코상은 역시나 오늘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짧은 등산로가 끝나갈 무렵 쭉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어주시니 하마터면 오른쪽의 비탈로 굴러떨어지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고도 본인은 그저 즐거우시다. 목숨을 잃을뻔한 자리라고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담아두는 데야 당할 재간이 없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미끄러져 죽을 뻔한 사연을 늘어놓기까지 하시니 참, 역시나 사코상은 전봇대와도 한시간은 너끈히 수다떨 만한 입담을 가지셨다.

사코상, 차림새도 남다르다. 

빵빵하게 가득찬 살짝 작은 듯한 배낭때문인지 배낭에 미처 못들어간 간식따위를 비닐봉다리에 담아 배낭 옆구리에 매달았으니 걸을 때마다 거기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에도 실소가 나온다.

나름 헨로복장은 많이 갖추었다. 스게가사에 하쿠에, 코보대사의 법복을 간략화시켰다는 오게사와 지팡이 콩고즈에까지 챙길 것도 많은 데 콩고즈에로는 부족하다고 가느다란 대나무 막대기를 주워 한손에는 콩고즈에, 다른 한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니 나름 노르딕워킹이라 할 만하다. 

그럼 뭐하냐고, 스틱을 양 손에 잡고도 내 걸음을 따라오지 못하면서 입으로는 지지 않겠다고 마케나이, 마케나이 하면서 일본인 특유의 곤조를 부리는 데 이 아줌마 그 모습조차도 밉지는 않다.

56번 국도를 따라, 이요키강을 따라 쿠로시오쵸 내륙을 쭉 걸어 내려오면 바닷가에 닿는다. 이제부터는 아시즈리 땅끝까지 쭉 바닷가를 걸을 게다. 오헨로미치에는 오헨로상이 어쩌다 지나칠 뿐 거의 보이지 않는데 드물게는 자전거로 캠핑장비까지 싣고 순례중인 자전거 순례자도 만난다.

한동안 손질을 못해서 길어진 머리와 수염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여름처럼 더운 날씨에 땀에도 쩔고, 씻지는 못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만 제대로 수행을 고행을 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그것에 비하면 이 아루키헨로는 차라리 양반이지 싶다. 쾌적한 숙소에 세탁, 목욕도 빼먹을 날이 없고 맛난 먹거리가 날마다 제공되니 말이다. 


이요키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쿠로시오쵸의 사가어항(佐賀漁港)이 있다. 이곳에서는 고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데 바닷가를 걸으면서 그런 기회가 오기나 할지는 의문이다. 고치현의 바닷가가 참 좋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드넗은 하늘과 드넓은 바다가 만나고, 가까운 해변에는 빨래판 모양의 검은 바위가 즐비하다. 사코상을 통해 그 바위들을 생김새에 맞게 세탁바위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오늘까지 닿아야 하는 절도 없고, 같이 걷는 사코상도 있으니 걸음은 느긋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남국의 정취를 흠뻑 느끼면서 걷는 길이 외롭지 않다. 

숙소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곳에서 시야에 꽂히는 판넬이 있다. '傷ついた心をいやす思いやり'라니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배려심 정도로 해석되겠다. 가슴에도 꽂히는 문구다. 이제까지는 내가 받은 상처만 중요하고 아팠는 데 내가 준, 줬을 수많은 상처들도 되짚어 보게 하는 문구기도 하다. 

나도 이 길에서 조금 성숙해져 가는 걸까. 돌아가서는 상처받기 전에 이해하고, 갚아주기 전에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게 될까. 아님 여전히 상처받은 것보다 더 많이 할퀴고 있을까.

마음만이라도 배려심을 커다랗게 키워서 돌아가고 싶다.


적당한 거리를 걷고 적당한 시간에 오늘의 숙소 우미보즈호텔( 海坊主ホテル)에 닿는다. 바닷가 전망좋은 곳에 위치한 데다 모처럼의 침대방이고 모처럼의 독차지할 수 있는 욕조가 딸려 있다.

걷기 여행이 아니라면 한없이 거닐어보고 싶은 해변이 지척이다. 

저녁도 성찬이다. 

저녁을 먹는 공동식당에서 고치현 초입의 민슈쿠 도쿠마스에서 만나 그 이후로도 종종 마주쳤던 기타야마상을 다시 만난다. 나름의 삶을 즐기는 것도 같은 기타야마상이 이런저런 꿈, 그리고 취미활동에 대해서 얘기하다가 사진만은 센스가 전혀 없다며 내게 70이 되서도 80이 되서도 사진을 계속 하란다. 에너지가 넘치는 나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면서. '저도 물론 그러고 싶지요'

저녁 식사 후에도 한동안 기타야마상과 사코상의 대화가 이어진다. 목소리도 작은 데다 같은 일본인끼리라선지 빠르고 사투리도 섞였는지 알아듣기 힘든다. 뭔가 둘이 꽤 심각해 보인다. 

대화를 끝내고 내 방으로 함께 올라온 사코상에 의하면 혼자 걷는 초로의 남자 오헨로상들은 가급적 멀리하는게 좋단다. 전부는 아니지만 간혹 이혼이나 사별로 가정이 불우한 경우가 있고, 여자 오헨로상한테 숙소나 식사 등 비용적인 지원을 해주면서 본인의 시중을 들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그러하니 오헨로미치에서 잠시라도 마주치는 남자 오헨로상이 어느 숙소에 묵는지 물어오면 가르쳐 주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한다. 기타야마상도 가정이 화목하지는 않아 보인다고 한다. 정확히 이해했는가는 모르지만 대충 그런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사코상도 사실은 남편과 오래전에 사별을 했다고 고백해 온다. 

처음 만났던 날, 한국 아줌마들은 집을 비울 때 곰국을 끓여놓는 반면에 일본 여자들은 오뎅국을 끓여놓는다던데 사코상도 그랬냐고 히히덕거릴 때도 남편이 가고시마에 있는 듯이 말했던 사코상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사코상도 밝은 모습의 이면에는 어떤 시름같은 게 있어 보이기도 한다.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특히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가슴에 크든작든 몇가닥씩의 상처를 가지고 그걸 치유해가는 여정일까.

웬지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렇다해도 사코상의 걱정은 내게는 기우일 거다. 기 센 대한민국의 딸인 내게 그렇게 접근해 올 오헨로상도 없을 듯하고, 접근해 온다고 해도 대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아군과 적군을 가려내는 촉을 가진 스스로를 믿는다.

그래도 일찍 남편을 여의고 두 아들을 키워내면서 신산했을 사코상의 인생 역정에는 신경이 쓰인다. 이제는 두 아들이 장성했으니 크게 힘들 일은 없겠지만 일본이라고 그 삶이 쉬웠을리는 없을거다. 그래서 생각이 많고 간혹 수심깊은 얼굴을 하는 사코상, 이 길이 그녀에게도 치유의 길이었으면 싶다.






우미보즈호텔 (2식포함) 6300엔


매거진의 이전글 #16, 시코쿠의 가을이 무르익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