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관하여
“미국에 오고 나서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나요?”라는 질문을 어느 잡인터뷰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었다고 대답했다. 문화 차이, 언어 같은 수많은 어려웠던 일 중에 커피를 주문하는 일을 꼽은 이유는, 내가 매일 쉽게 하던 일이 미국에 오고부터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본다.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 끝도 없는 질문이 시작된다. 크림, 하프 앤 하프, 우유 중에 어떤 걸 원하는지 묻고, 우유를 선택하면, 지방 함유량에 따라 2%, 무지방 밀크, 거기에 아몬드 밀크, 귀리 밀크까지. 이 중에 어떤 우유를 넣을 거니? 처음에는 이런 질문들이 참으로 난감했다. 이전의 나는 내가 마시고 싶은 우유의 지방 함유량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어떤 우유를 커피에 넣고 싶은지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가장 인기 많은 순서로 미리 세팅이 되어있는 메뉴를 고르기만 하는데 익숙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하나하나 세세히 고르는 질문을 대답하는 건 고문에 가까웠다. 특히나 초기에는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긴장감도 있어 매번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기분이었다. 제일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걸로 주면 난 상관없는데 왜 이리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지. 커피를 주문하는 간단한 일은 이제 내 뒤에 줄을 곁눈질하며 대답하는 무척이나 초조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 순간 커피를 주문하면서 ‘시럽은 한 번만, 우유는 귀리 우유로 주세요’라고 묻기도 전에 대답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요즘엔 달라졌을 테지만 내가 떠나기 전, 십 년 전 한국에서 이렇게 주문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이렇게 주문하는 것을 보았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때 나에게 이미 만들어져 있는 메뉴 중에서 몇 가지를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물어봐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문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은 왜 이리 까탈스럽게 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아직도 기억나는 건 대학 때 술집에 가면 늘 있었던 '아무거나'라는 메뉴. 메뉴의 선택권을 모두 식당에 주고, 식당에서 알아서 메뉴를 골라 조금씩 샘플러처럼 만들어 줬었던 메뉴였다. 나와 친구들은 이 메뉴를 뭔가 고르기 힘들 때 종종 시켰던 기억이 있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이 질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달라진 점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단 음식은 싫고, 초콜릿 시럽도 싫고, 신맛 나는 건 싫고, 물은 차가운 게 좋고, 맥주는 라임 한 조각이랑 같이 마시는 게 좋고... 이전에 모르던 나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며 내가 무엇이 좋은지 알아보고 싶어 졌다. 특히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골고루 다 잘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어떤 음식을 넣고 뺀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위를 보면 선호도의 문제를 떠나 다양한 이유로 특정한 음식을 먹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유를 소화 못해서 우유를 빼고 먹는 사람, 글루텐이 소화 안돼서 글루텐프리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사람, 또는 신념의 문제로 채식주의자인 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가 먹고 싶은 것 또는 아닌 것을 결정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여러 가지 음식을 시도해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가는 것뿐만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처럼 삶에서의 중요한 선택까지 이어진다고 믿는다.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보며 서서히 내가 좋아하는 일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내 안에 쌓여 단단한 무게중심처럼 수많은 선택을 하는 순간들에서 선택을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생애 수많은 순간들에서 “나의 선택들이” 지금 이 삶을 만들었고,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미래의 나의 선택들이 “나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라 믿는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아닌, 가장 인기 많은 것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내 인생을 만들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