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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요 Mar 21. 2022

내 집 없는 게 지긋지긋해

서른을 코 앞에 둔 어느 날, 집을 사기로 결심하다

해는 2020년, 바야흐로 코로나가 폭발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써야하나 말아야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그 시점, 나는 회사에서 담당하던 가수 태연씨의 공연 현장에서 열심히 마킹 테이프를 바르고 있었고 집주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에 저장된 집주인의 이름은 "합정동 마음에 쏙 드는 집주인". 그만큼 처음 본 순간부터, 아니 커뮤니티 게시글에 올라온 집 사진을 본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집이다. 다가구 주택이지만, 1층만 단독으로 드나들 수 있는 대문과 햇빛을 쬘 수 있는 층계참이 있고, 작지만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큰 나무가 있는 마당이 있어 창 밖을 바라보면 초록빛이 제대로 느껴지는 집. 마당의 나무는 모기가 엄청나게 꼬이긴 했지만, 합정동에 나무 한 그루를 소유했다는 내 마음의 자랑이었다. 내부는 어떤가하면, 80년대 중상류층이 살던 느낌의 원목으로 벽, 천장, 바닥이 모조리 발린 빈티지하고 멋진 집이었다. 거실의 통창으로 마당의 초록과 햇빛이 그대로 드나드는 집. 합정동 한 가운데 있지만, 일단 내부로 들어오기만 하면 전원주택 부럽지 않다고 느껴지는 집. 누구나 좋아할 순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좋아할 그런 집이었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이 레트로 컨셉 카페에 온 것 같다고 칭찬을 마지 않던, 나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에 퍽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참고로, 지금은 스튜디오로 바뀌어, 레드벨벳 예리의 싱글 뮤직비디오 촬영장소로 발탁되었고, 그녀의 뮤비에 내가 살던 집이 그대로 박제되어있다.) 


아무튼, 그런 집의 집주인은 월세를 따박따박 제 날짜에 꽂기만 하면 일체 간섭이 없는 비교적 젠틀한 분이었기에, 전화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통화의 본론은 "집을 매매로 내놨으니, 알고는 있어라. 팔리면 계약 기간이 끝나면 바로 나가야될지도 모른다" 였다. 이때까지 숱한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로 이만큼 마음에 들어온 집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에 정말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은 지금도 그 집을 생각하면, 마음이 즉각적으로 포근해지고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는 것이 슬프다. 오죽하면 매매가를 물어봤지만, 지은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합정동의 다가구주택 가격은 자그마치 26억이었다. 

집을 내놨다는 전화를 받은 지 한 달 정도 된 어느 날, 나의 자랑인 마당의 큰 나무가 내 눈 앞에서 인부들에게 잘려나갔다. 아마도 집을 내놓고 보니 정리가 안 되어 풀이 무성한 마당이 눈에 걸렸던 것 같다. 집주인이 아닌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내 나무가 잘려나가는 걸 내내 보고 있다가, 나무의 잔해를 소중하게 집 안에 모셨다. 눈물이 고였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나무에, 그것을 지키는 요정인양 마음을 너무 많이 줬다. 그 순간, 집이 없는 게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에 서울에 올라와서 자취를 시작한 이례로, 처음으로. 


10년 간 집을 옮겨다니는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2년의 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면, 이번엔 어디서, 어떤 집에서 살아볼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물론 집을 보러다닐 때마다 마음이 많이 초라해지고, 서울 월세 집의 구림은 아무리 경험해도 적응이 잘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켠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설렘이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의 날, 아무도 소유권을 인정해주지 않은 내 나무가 잘려나가던 무력감은 컸다. 치앙마이에 집을 사야하기 때문에 그보다 3배나 비싼 서울 집은 살 일이 없을거라 호기롭게 말했던 나는 사실 서울에서 마음을 줄 수 있는 집을 만나지 못했던 것던 뿐. 월세 집을 사랑하고보니,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상실감은 컸다. 내가 누구보다 구석구석 잘 알고, 내 생활에 맞춰 잘 가꿔진 곳이 언제든 다른 사람에 의해 침해될 수 있다는 것. 언제든 떠나야 한다는 것. 아마 그 일이 아니었다면 실감하지 못하고, 계약을 연장하며 살거나 다른 월세 집을 알아봤을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그 집은 계속 팔리지 않았고 새 월세인을 만나게 되었지만, 서울에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다른 사람의 의지에 내 생활공간이 좌지우지되지 않을 자유가 갖고 싶었다. 소유는 자유를 방해한다고만 생각하고 왠지 치를 떨어왔는데, 소유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집을 사기 위해 청약적금을 붓고 돈을 이 꽉 깨물고 모으는 이 세상에서, 나만 그걸 몰랐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서울에 집을 사는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이직 만랩의 나는 8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야금야금 1년 반 정도를 백수로 지냈다. 날이 따뜻한 치앙마이에서 보내거나 망원동 바닥을 돌아다니거나 하면서, 가진 돈을 1억도 안되는 보증금 빼고는 버는 족족 다 까먹었기 때문이다. 그 돈으로 치앙마이의 오피스텔을 사는 건 가능했어도, 서울 부동산은 택도 없었다. 아예 선택지 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볼수록, 집을 사야할 명분이 자꾸만 생겼다. 우선 나는 그동안 고양이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는 너무나 쫄보라, 이삿 날마다 맞닥뜨리는 부산한 환경에 기가 확 죽어서 힘들어하는 게 한 눈에 보였다. 그 기세가 회복되는 데에는 일주일 정도 걸렸다. 2년 동안 자꾸 자꾸 이사 다닐 것을 생각하니, 2년마다 고양이 나이로 12살씩 먹는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가 걱정됐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호기심과 에너지도 점점 꺾여갈 것이었다. 그와 함께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공간을 갖는 게 내 마음에 갑자기 아주 중요한 문제로 쏙 들어왔다. 

나조차도 이사를 할 기력이 점점 쇠했다.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하기까지 그 모든 절차와, 잔금이 안 들어와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이삿짐 센터분들께 연신 사죄하며 장장 3시간을 기다려야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옛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아 새 집주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데, 집주인들이 보증금을 보관하고 있다가 옛다 하고 주는게 아니라 새로 들어올 임차인에게 받아서 나에게 토스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살던 곳에 들어올 분들도 그들이 살던 옛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아서 나에게 주고, 나는 그걸 받아서 새로운 집주인에게 주고, 그러면 새 집주인은 그걸 나가는 옛 임차인에게 준다. 이 연쇄적 고리에서 빌런이 한 명만 껴도 아주 하루종일 연루된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진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살던 짐을 챙겨 다른 곳에 풀어놓으면 끝인게 아니라, 단위가 다른 현금 흐름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이라 서로가 예민하고 어려웠다. 그리고 새로운 동네를 골라 살아볼 수 있다는 기쁨은, 정말 사랑하는 동네를 만나자 빛이 바랬다. 합정동 7번 출구 인근은 출퇴근길에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모여있었고, 단골 빈티지가게도 가깝고, 엄청난 피자 맛집도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여러모로 나에게 유익하고 아름다운 동네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 집을 가진 이 시점에도 나는 그 곳이 여전히 그립다. 


이때까지만 해도 집을 산다는 생각은 막연했으며, 실체가 없었고, "어쩌면 집을 사게될 지도 모른다"는 것에 가까웠다. 일단 매매로 나온 집들을 보기나 하자,고 생각했다. 예산안도 대출 계획도 뭣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옷 사러가는 것처럼 집 쇼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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