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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 Baek 백산 Aug 10. 2023

우리에게 필요한 것 (1): 무대와 배역

고유의 재능을 펼쳐볼 무대와 관객, 그리고 역할

1. 매주 90분이 준 선물

몇 달 전 어느 날 일이다. 평소부터 잘 알고 지냈던 교수 겸 창업가 한분이 시간을 내서 나를 만나러 와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실리콘밸리로 취업이민을 준비하는 주니어 개발자/데이터사이언스들을 멘토링 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산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들어보니 그 취지와 방향성 모두 많이 공감이 갔다.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 같아서 선뜻하겠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었을 때 거의 모든 게 내 재량에 맡겨졌다. 어떤 주제로 언제 얼마만큼 이들을 멘토링 (?) 할지 모든 게 내게 백지수표로 주어졌다. 처음엔 가이드나 검수 프로세스조차 없어서 살짝 놀랐지만 이렇게 된 거 평소 하고 싶었던 거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12주간 주 1회 90분 정도씩 수업하고 중간에 숙제와 그룹 프로젝트가 있는 실라버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Zoom으로 이들을 만났다. 15명의 어리고 생기발랄하고 꿈꾸며 도전하는 친구들을. 


막상 시작하고 보니 주 1 회지만 밤 9시에 90분씩 무언가를 한다는 게 상당히 부담됐다. 평일저녁 9시는 내 모든 게 탈탈 털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마의 시간이었다. 새벽부터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고 퇴근해서 애들 재우려고 씨름하거나 아니면 막 재우고 나서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누워 좀비처럼 핸드폰 쳐다보는 그런 시간... 그 시간에 억지로 몸을 이끌고 컴퓨터에 앉아 줌을 켜고 무언가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10시 반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내 눈은 반짝였고 내 몸은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해졌다. 바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의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늘 그랬다 12주 내내. 


2. 선생님이란 배역, 멘토링이란 무대


15년 넘게 이런저런 일을 해보면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백산"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그중 하나는 내게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 (passion)과 재능 (gifting)이 있다는 것이었다. 


애들을 낳고 키우다 보면서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누구에게나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영어론 그걸 gifting (선물)이라고 한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내게 선물로 주어진 것.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 - 그건 내게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었다. 


문제는 살다 보면 그 선물을 제대로 쓸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재능을 쓰려면 우리는 그에 맞는 무대와 배역이 필요하다. 내게는 이번 멘토링기회가 그 무대였고 선생님/멘토라는 역할이 배역이었다. 물론 내가 가르치고 마음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상대편 배역/관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 관객 이상으로 배우에게 필요한 시간

12주의 시간이 거짓말처럼 흘렀다. 학생(?)들과 정들어서 집에 와서 같이 밥도 먹고 이것저것 따로 시간 내서 삶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맙다/감사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어찌 보면 내게 더 필요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만큼이나 내가 선생님이란 배역을 하면서 더 피어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 168시간 중 1%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남은 99%의 시간이 줄 수 없는 소중한 에너지와 활기를 주는 시간이었다. 온전히 몰입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해 기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나답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연을 보는 관객보다 배우에게 더 필요한 시간.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시간은 그런 시간일지 모른다. 내게는 이 시간이 그랬다. 어렵게 낸 주당 90분이지만, 내게 그 몇 배의 시간과 에너지를 새롭게 선사하는 그런 시간. 내 타고난 성향/gifting과 맞는 일을 하는것, 그런 기회와 부름이 있을때 응하는것, 그건 새로운 에너지와 상상력을 가져온다. 

꿈꾼다 - 나와 우리가 더 피어나는 시간을. 그런 무대와 배역들을...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그건 무대와 배역이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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