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만에 다시 보고 떠오른 기억과 감정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를 처음 본 건 2022년 8월 어느 주말이었다.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이 열렸고, 윤나무 배우가 연기하는 회차를 봤다. '더라스트맨'을 계기로 1인극에 관심이 가던 차였고, '쇼맨: 어느 독자재의 네번째 대역 배우'에서 윤나무 배우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 훌륭한 작품을 좋은 배우가 표현하니 메시지가 잘 전달되는 듯도 했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전부터 호평을 받고 마니아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작품이라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돼서 봤다.
처음 그 작품을 봤을 때 공연시간 내내 시종일관 관통하던 감정은 먹먹함이었다. 같지 않지만, 비슷하지도 않지만 이 극의 어떤 장면과 삶에 중첩되는 점이 있었고, 그 일은 그 때도 지금도 많이 아프고 슬픈 기억이라 공연보는 동안 그 일이 자꾸 떠올라서, 정확히는 그 일을 겪었을 때 느낀 감정이 다시 떠올라서 공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눈물이 계속 났다. 병원에서 의사가 차분하게 냉정을 지키며 환자 상태를 가족에게 덤덤히 설명하던 모습. 재판에서 내리는 일종의 선고와 같던 그 말들. 새하얗게 질린 얼굴 표정과 백지 상태가 된 머리.
그 이후 심장이 심장의 주인을 떠나가던 그 장면. 마치 입관할 때 가족이 돌아가면서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 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그 장면도 감정을 더 북받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심장의 주인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 그가 평소 사랑했던 그 현장을, 그 소리를 들려주는 장면이 어떤 의식과도 같았다. 누군가의 삶이 종료되는 과정을 보여줘선지 그 장면을, 심장 이식 코디네이터가 가족 대신 건네주는 마지막 인삿말을 보고 듣는 동안 숙연해졌다.
작품의 인상이 무척 강렬했고, 살면서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심장 의미를 되뇌이게 해 기억에 크게 남았다. 원작이 소설이라 소설도 읽어보고, 연극은 OST도 나와서 나중에 사서 들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그 OST를 들으면 삶의 경외심도 느껴지는 듯하고, 주어진 하루가 참 소중하니 잘 살아야한다는 책임감도 생기는 듯했다. 그게 생긴다기보다 그걸 스스로 인식하게 하려고 그 OST를 아침마다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은 장대하게 서술되고 등장인물도 많아 처음엔 잘 읽히지 않는데 그나마 연극을 먼저 보고 봐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는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란 점에서 감명받는 정도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작품이 주는 여운 또는 파문이 너무 크게 다가오는 사건이 내 인생에도 생겼다. 내 생애 가장 슬픈 날. 그날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다만 예고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한달 남짓한 시간을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계속 보냈다. 처음 며칠은 굉장히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그러다 한편으로는 이 비극이 이번만큼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적이 일어나서 비극이 극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을까. 근거는 없지만 실낱같은 기대가 들 때도 있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좋지 않은 일을 자신을 비껴 나갈 거라고 생각한다고. 나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고, 내게도 이러저러한 좋지 않은 상황이 다가왔지만 막판에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과정이 어렵지만 해피 엔딩이 있을 거란 기대. 살면서 운좋게 그런 기적이 여러번 있었기에 허무맹랑할 수 있는, 그러나 간절한 낙관을 그때도 품었나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다가오는 파고를 어떻게도 막기 어렵고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한달 남짓한 예고와 준비 시간을 보내면서 이 작품이 건네는 메시지와 OST가 들려주는 심박 소리와 그 어느 때보다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심박 소리는 어느 순간 들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병원에서 모니터 화면 속 심박수와 산소포화도 수치를 열심히 째려 봤다. 심박수가 100 이상을 넘어가면 긴장되고, 산소포화도가 일정 수치를 넘어서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누군가의 심장 활동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숨을 죽이며 어떨 때는 일정하고, 어떨 때는 과도한 그 활동을 지켜봤다. 10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쉴새 없이 뛴 그 심장을.
그 일이 있고나서 삶이 많이 바뀌었다. 매년, 매분기, 매달, 매주, 매일 삶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겠지만 핸들을 꺾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궤도 전환이 그로부터 몇달동안 내 삶 속에서 벌어진 것 같다. 그일과 별개로 일어나야 했던 변화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일이 도화선 또는 전환점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많이 바뀐 듯하고. 그러다 다시 돌아온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와 사람 간 관계라기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끼리 관계도 많이 변했다. 그게 내게 영향을 끼칠 때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 일이 일어난 뒤로- 관계의 구심점이 사라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존재를 중심으로 결속된 인간관계가 존재의 부재로 고리가 약해지거나 해체와도 비슷한 상황으로 가는 느낌도 받았다. 서로를 향한 배려는 사실 의무감과 인내심으로 비롯됐다는 것도 깨달았고. 내 인생의 일부는 거기에 빚지고 있었다는 것도 실감났다. 어쩌면 물리적으로 더 편해졌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은 더 외로운 느낌도 주는 듯하고. 가끔 연극 '온더비트'의 그 대사도 생각난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 깊숙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책을 보면 심장 의미를 서술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문장도 많고, 생각지 못한 통찰을 주는 내용도 풍부하다.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꼽으라면 역시 이 소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인 듯하다.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무엇인지, 그 인간의 심장, 태어난 순간부터 활기차게 뛰기 시작해서 그 일을 반기며 지켜보던 다른 심장들도 덩잘아 빨리 뛰던 그 순간 이래로 그 심장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튀어 오르고 울렁대고 벅차오르고 깃털처럼 가볍게 춤추거나 돌처럼 짓누르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는지,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무엇인지, 스무 살 난 육신의 블랙박스, 그것이 무엇을 걸러 내고 기록하고 쟁여 뒀는지, 정확히 그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비르질리오는 그 장기가 갖는 최고의 권위가 병원 복도를 뛰어다니는 심장외과의들, 배관공이자 반신인 그들에게 미쳤듯이 그에게도 미치리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기 위해 심장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심장은 심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는 그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 권위가 실추되었을지라도(심장 근육이 운동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에게 심장은 신체의 중심 기관이자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본질적인 생명 현상들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그것의 상징적 위계는 여전히 아무런 손상을 잃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더구나 비르질리오는 최첨단 기계 장치이자 초강력 상상 실행자인 심장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육체, 다른 인간들, 창조주, 신들과 맺는 관계를 규정하는 표현들의 요체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그 젊은 외과의는 심장이 언어 속에 새겨져 있음에, 원래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가, 근육과 감정이 정확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늘 자리하며, 언어의 마법이 발휘되는 그 지점에 심장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경탄한다. ...(중략)
아르팡이 알리스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평소의 안색을 되찾은 알리스가 미소를 지을락 말락 하고 있는 동안. 비르질리오가 수술모를 벗고 마스크를 내린 뒤, 몽파르나스 쪽에서 맥주 한 잔과 감자 튀김, 그리고 이 분위기의 연장을 위해 피가 뚝뚝 듣는 스테이크를 즐기러 가자고 그녀에게 제안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동안. 그녀가 하얀 외투를 다시 걸치고 그가 그 하얀 모피 깃을 쓰다듬는 동안. 마침내 키 작은 초목 주위로 조금씩 빛이 스며들고, 이끼에 푸른 빛이 돌고, 방울새가 노래하고, 그 거대한 파도타기가 디지털 문명의 밤 속에서 갈무리되는 동안. 현재 시각, 5시 49분."
개인적으로 소설 마지막 부분을 정말 좋아하는데 연극의 마지막 대사에서는 소설에 나온 문장이 좀 빠져 있다. 그대로 들어간 문장도 괜찮지만 자연 속 모습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아침이 밝아오는 광경을 설명하는 게 내 기호에 더 맞았다. 아무튼 소설을 꼭 보는 게 좋은데 연극과 비교해보면 연극에 핵심적 내용은 들어가 있지만 그래도 다 담지 못한 내용이 있고, 소설은 원작인 만큼 행위나 사물 의미가 무척 세세하고 풍성하게 나와서 좋다. 그걸 놓치는 것보다 일단 다 보고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은 평생의 양식으로 주워섬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고.
지난 주말에, 1년 6개월여만에 이 작품을 연극으로 다시 봤다. 연극을 한 번 보고, 책을 읽고, 좋아하는 문장을 따로 기록해서 자주 보다보니 내용이 기억 속에 많이 남은 듯했다. 오랜만에 보면 완전 새로울 줄 알았는데- 배우가 표현하는 방식은 새로운 것도 있지만 내용은 많이 익숙해졌다. 그렇다보니 벅참의 정도도 아예 아무것도 모르고 처음 봤을 때와 좀 다른 듯했다. 그러나 그게 내용을 꼭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1년 6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달라졌을 수 있고. 그 사이에 나로선 엄청 큰 일도 있었고.
그 일을 기점으로 내 자신에게 드는 생각은-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더 풍부해지면서 한편으로는 더 건조해진 것 같기도 하다는 것. 옆이 어떻게든 거들떠보지 않고 사정없이 들쑤시는 드릴처럼 일상을 살고 있어선지 몰라도 가상의 존재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울컥하는 일은 전보다 덜해진 것 같단 생각도 들면서(그러나 오늘 일로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일이 내게 너무 큰 영향을 미친 일이라서 그런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에게는 곧잘 공감하거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건조해지기보다 차분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눈물 버튼은 비슷했다. 의사에게서 시몽의 상태를 듣는 부모의 마음을 서술하는 내용에서는, 의사의 단호한 선언에서는 2018년 10월, 2022년 9월의 어느 일이 떠올랐고- 그 일은 여전히 아픈 일이라 그 장면에서 여전히 마음은 격양됐다. 시몽을 직접 마주한 부모의 모습, 심장의 주인이 심장을 떠나갈 때 그 현장도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마음이 먹먹했다. 새로운 심장의 주인이 심장을 받아들이기 앞서 느끼는 부채 의식, 슬픔을 설명하는 장면도 마음을 울렸다. 살아남았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상황. 그게 누군가의 희생과 상실을 담보로 한 거라면.
하나의 메시지로 감상을 정리하기보다 생각나는 것, 기억나는 걸 두서없이 마구 적어 '어쩌라고' 식의 글처럼 읽힐 수도 있을 듯하다. 꼭 한 문장으로 나만의 주제의식을 정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 작품 내용, 관련된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본 건데 그냥 '심장이 고맙다'고 생각한다. 신앙 의미를 더한다면 그렇게 만든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고. 돌아보면 세상에 숨이 붙어있는 동안 쉬지 않고 일하는 게 기계나 로봇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장기라는 게 경이롭다. 그만큼 소중하고, 건강하게 잘 아껴줘야 한다 싶기도 하고. 어쩌면 올바른 방식으로, 또는 건강한 방식으로, 또는 건전한 방식으로 잘 대해주는 것도 여기에 속하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