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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어 Jun 06. 2016

천일동안

천일동안 남긴 일상의 기록들에 대하여


자축할 일이다. 매일 일상 기록. 천일을 썼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은 그 천 번째 노트에 마침표를 찍은 날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 나 스스로 '그냥' 하고 싶어서 지속해온 일. 그냥 하다 보니 하지 않으면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하여 하지아니할 수 없게 된 일. 그렇게 습관이 된 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행을 떠나나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나. 피곤하나 기분이 업업 붕뜨나. 그 어떤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천일동안 한 가지 반복을 지켜왔다. 반복이 반복되어 반복에 무덤해지며 별다른 신경을 쓰고 있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노트 개수가 999를 나타내고 있어 문득 어라?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노트 개수가 1,000이 되는 걸 보곤.. 내심 뿌듯하다. 자축할 일이다. 지난 천일동안 매일 무엇을 기록해왔던가.


일상에 대한 기록. 독서를 했는지 했다면 무슨 책을 읽었는지 내용은 뭐였는지. 외국어 공부는 했는지 했다면 어떤 언어를 무슨 내용으로 공부했는지. 요리를 했는지 또는 배웠는지. 운동은 했는지 했다면 무얼 얼마만큼 했는지. 그날그날 작은 도전과제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도전은 무엇이었고 무엇을 배웠는지. 몇 시에 기상했는지. 아침, 점심, 저녁은 각기 무엇을 어디서 누구와 먹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 감상은 어떠했는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2015년 1월 전기, 가스 요금이 얼마였는지(주로 영수증 사진을 찍어둠). 어느 날 찾아온 보험컨설턴트가 무슨 이야기를 했고 어떤 상품을 소개했는지(주로 녹음해둠). 커피는 어느 회사 제품으로 몇 mL 정도를 마셨는지..


..이런 사소한 내용을 지난 천일동안 꾸준히 기록해왔다. 그래서 지난 천일을 돌아보면 내가 몇월 며칠 몇시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꽤나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가 있다. 사진과 글을 대비하자면 사진은 순간을 미분하고 글은 그것을 적분한다고나 할까. 기록을 통하면 과거의 기억들을 소상하게 음미할 수 있다. 느리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기억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구나. 내가 그렇게 '존재'했었구나. 기록이 소환하는 기억은 의외로 농도가 진하다. 


일상 외에 천일동안 꾸준히 기록한 것은 미래에 대한 것들이었다. 꿈을 꾸었는지 꾸었다면 어떤 꿈이었는지. 인생의 선언문 같은 게 떠올랐는지 떠올랐다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장차 해보고 싶은 일 또는 직업이 있는지 있다면 그게 무엇이고 그 일을 위해 오늘 당장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나의 기록에서 중요한 점은 일상이 우선이고, 꿈과 목표는 차선이라는 점이다.


내가 원하는 일상이란 이런거다. 아침 햇살을 마음껏 음미하다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정갈하게 차린 식사를 마치고 또 설거지를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집안 청소를 하고 잠시 산책을 떠날 줄 알며,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한숨 돌리다, 독서와 외국어 공부를 통해 천천히 조금씩 단단하게 성장하는 자신을 음미하고, 그러다 조금 지루할 땐 과감히 밖으로 나가 맨손체조, 줄넘기, 축구, 자전거 타기 등 운동을 하고, 원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등.


일상에 파묻혀있다가 가끔 고개를 들면 드는 생각이 있다. 아, 내가 이 맛있는 밥을 지금처럼 음미하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 아, 이렇게 아내가 설거지할 때 나에게 청소기를 돌릴 여유 같은 게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아, 이렇게 데굴데굴 여유 부리다 아이스크림 산책을 떠날 시간이 없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 같은 생각들. 지금은 반대로 그 모든 걸 가지고 있음에 정말 감사하다. 건강함에 감사하고, 시간이 넉넉함에 감사하며, 마음이 여유로움에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참 운이 좋다고도 하루에 몇 번씩이고 생각한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게 없을 정도이며, 단지 이 일상이 유지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님도 무한도전에 출연해 일상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살고 있던 아파트 1층의 어린이집, 맡겼던 아이를 늦게 데리러 간 날,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우르르르 나오던 종일반 아이들.. 그때 제가 대사로 썼던 게 '우리를 위해 열심히 사는 건데, 우리가 피해를 보고 있어' 지금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특별하게 크루즈 여행을 못 가거나 여행을 못 가서가 아니라 일상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고민..




그래. 일상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이 지속적으로 재미있으려면 조금씩 변화가 필요할 터. 그래서 언젠가 내 일상의 조각에 끼워 넣고 싶은 직업이나 되고 싶은 모습 같은 걸 생각해본다. 언젠가 역사박물관의 일류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기도 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 노래는 잘 부르는 것 같은데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없어 잘 놀고 싶은 날 잘 놀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꼭 악기를 배워 싱어송 라이터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늘 맛있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요리사도 되고 싶다.


이런 변화를 상상하며 그에 따른 할 일을 일상에 정렬해두고 조금씩 천천히 단단하게 하나씩 실천하며 사는 건 무척 설레이는 일이다. 느린 연유로 다른 누가 눈치채지는 못하는데, 적어도 나만은 변화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니 그 즐거움이 참 소소하며 담백하다. 자존감이 춤을 춘다면 그 느낌이 이러할까.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저는 제 일상이 너무 좋아요. 평생 이대로만 지켜내고 싶을 정도로. 그런데 나만 행복하면 안 되잖아요. 나만 좋고 함께 즐기는 사람이 없는 것, 그건 자위행위나 마찬가지죠. 함께 행복해야 돼요. 그래야 사랑이죠.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 모두가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그걸 발견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게 제 소망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천일동안 꾸준히 작성해 온 나에게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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