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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어 Jun 19. 2016

텅빈 마음

어머니에게 30만원을 부치며

엄마가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가 이달에 좀 쪼달린다 삼십만 주면 좋겠네 미안' 밥 먹던 중이라 답장하지 않았다. 곧장 다시 문자가 왔다. '엄마가 이달에 좀 쪼달린다 삼십만 보태주라 미안' 문장과 띄어쓰기가 조금 다르다. 같은 말을 다시 적어 보낸 것이다. 무슨 일일까. 평소 아픈 데가 있어도 늘 참고 살고(부모님이 그렇게 사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도 아플 때 자연치유 따위를 운운하며 병원을 안 가는 고오얀 고집이 있다), 힘들어도 안 힘들다 그러고, 돈 없어도 끄이억끄이억 아껴 살며 아들에게 부담 한 번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당신인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 긴축하고 긴축해서 긴축으로 살아내고 있는 부모님의 경제에 30만원 펑크가 난 걸까. 궁금하지만 오히려 물어보기 어렵다. 어디 뭐 보이스피싱에 걸린 건 아닌가. 약장수에게 약을 사신 건 아닌가. 혹시 나 몰래 어디 아파서 병원에 다니시는 건 아닌가. 두 번째 문자를 보고는 즉시 30만원을 송금해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50만원 부쳐 드리고 좀 더 넉넉하게 쓰시라고 할걸..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90년대 후반부터 환경미화원 일을 해오신 아버지의 정년 퇴임이 3년도 채 남지 않았다. 환경미화원은 처음엔 구청에 소속된 정규직이었지만 아버지가 일을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구청과 결탁한 하청의 관리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예산이 줄었는지, 아니면 하청업체에 서울메트로 메피아 같은 마피아가 존재하는지 가장 밑바닥에 있는 미화원들의 근무환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열악해졌다. 누군가 퇴임하고 나가면 사람을 뽑아야 되는데, 안 뽑더라. 그 과정에서 인당 담당 지역은 계속 넓어졌고, 미화원 평균 연령은 고령화된다.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인데, 밑바닥 노동자에게 자비 따위 없다. 하청으로 넘어가기 전 공무원과 유사한 방식으로 받던 수당 혜택 따위도 없어지고, 휴가도 원하는 방식으로 쓰기가 어렵다. 그나마 요즘은 너무 많이 퇴직을 해서 그런지 조금 뽑긴 뽑더라. 우리 형도 약 5년 전 동네에 미화원 자리가 났길래 지원했다가 툭. 떨어졌다. 체력 테스트 종목 중 달리기를 하다가 자빠졌단다. 팔을 쫘악 갈았는지 딱지가 깊이 졌던데. 참 지지리 운도 없어라. 그렇게 20년. 자비로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오신 적 없고, 좋은 가방 시계 양주 하나 사보신 적 없으며, 옷은 늘 아울렛 가서 쎄일하는 것만 사고, 재래시장에서 반찬꺼리 사다가 알뜰하게 끼니 해결하며 사셨는데, 부모님은 모아두신 돈이 땡전 한 푼도 없다. 참고로 어머니는 나 어릴 적 떡볶이, 오뎅, 돈까스, 팥빙수, 아이스크림, 붕어빵 등등 온갖 계절별 장사로 노오오오오오오력(곱하기 일만시간) 하다가 어느 날 허리 디스크, 한때는 하반신 마비 등 병마가 찾아와서 은퇴하신지 오래인터라.. 당연히 노후 준비 따위는 전혀 되어있지 않다. 전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이라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것을 꾸준히 내지 못한 죄로 국민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남은 수십 년 동안 유일하게 보태달라고 할 곳이라고는 두 아들밖에 없으리라. 살면서 몇 번이고 기대고 싶으셨을 텐데. 아직까지 제대로 기대어 드리게 해 준 적이 없는 것 같아 늘 마음이 허하다. 서민에게 노후 준비는 사치다.


큰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기대면 푹푹 쓰러졌다. 초등학교 때는 병치레하느라 푹푹. 중고등학교 때는 오락에 미치고 공부는 뒷전이라 푹푹. 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은 진학하지 못했고, 군대 다녀와서는 직업 훈련소 전전하느라 푹푹. 그나마 기술 배워 조선소에서 용접할 때는 좋았는데,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되어 더 이상 용접은 할 수 없게 되어 서른 초반에 실업을 맞아 푹푹(참고로 해당 회사는 STX 조선의 3,4차 하청업체 쯤 되는 곳이었는데 2008년 내가 IBM에 입사하던 당시 입사 동기 중 STX 강덕수 회장의 딸이 있었다는 것도 삶의 아이러니). 당시 형은 산업재해 신청 안하면 더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회사의 회유에 말려 재해 신청을 미루고 기다렸다. 그런데 며칠 뒤 회사 노동자 한 명이 철근 관통사(死)를 당했다. 이 사고는 재해처리를 안할 수가 없을 터. 여기에 형 마저 추가로 재해신청할 경우 회사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져 더이상 원청으로부터 일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사 사정 봐주자며 기다린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변명으로 일관하며 요리조리 전화를 피하는 등 부적절한 조치를 일삼았다. 그렇게 집에서 쉬는 동안 살이 찌고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는 등 엎친데 뒤친 격으로 인생은 더욱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푸욱푸욱. 이 과정에서 형은 죽고싶다는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그랬듯 형에게도 되물림되는 생존의 무자비. 밑바닥 노동자에게 자비 따위 없다. 아. 그나마 참 다행으로 그 과정에서 각성한 형은 뒤늦게나마 2년제 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했고(부산 동주대학교. 참고로 이 대학의 이사장 손자가 나의 어린 시절 친구인데 그 친구는 수능시험 망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사라진 뒤 보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파로 한국에 등장. 삼성물산에 사원으로 입사했는데, 현재 판교 40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형이 졸업할 때 엄마가 이 친구에게 연락해서 형 일자리 좀 봐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시던 것도 삶의 아이러니. 물론 연락 안 했다. 못했다.), 졸업 후 정말 운 좋게도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이제 좀 풀리려나) 직장을 구해 잘 다니고 있다.


학창 시절에는 그런 형이 오지게나 미웠다. 어쩌면 저렇게 생각 없이 사는지. 오죽했으면 내가 군대 있을 때 형에게 썼던 편지 중 '오락기 갖다 버리지 않으면 제대하고 나가서 다 부수겠다'는 협박 편지도 있었다. 엄마 아빠가 그 편지를 읽고는 어떻게 형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며 나에게 도리어 화를 내셨는데. 난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그게 형을 위한 길이라 믿었고. 제대하고 집에 가면 오락기를 부수고 말겠다고 재차 다짐할 뿐. 하지만 막상 제대하고 나니 그런 결심 따위 개뿔. 다 잊어먹고 내 인생 독고다이 즐거운 일만 찾아다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주위 온갖 사람 만나며 살다보니 문득 느껴지더라. 아니, 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어렸을 땐 형이 잘못한 것들만 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형의 운 나쁘고 불쌍한 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초등학교 때 심각한 천식이 있었던 건 형 잘못이 아니었지. 직업 훈련소 전전긍긍 이 직장 저 직장 옮겨다닌 것도 근무 환경이 열악할 때 한 번씩 도지는 그 천식 때문이었어. 그 천식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탓은 게으름이 아니었어. 부모님이 사방팔방 명의 찾아 뛰어다니셨는데. 탓할 곳을 찾자면 지지리가랭 찢어질 가난이지. 더 좋은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던 가난 탓이었겠지. 부모님은 푹푹 쓰러지는 큰 아들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조선소에서 짤린 건 본인 잘못이었나. 성실하게 벌어 쥐 죽은 듯 조용히 먹고살겠다며 한 여름 대뇌피질을 녹일 것 같은 조선소 현장 뛰어다니며 용접질하고 있던 노동자의 손에 떨어진 그놈의 매정한 철판. 그놈 잘못이지. 우리 형이 열심히 안 살지는 않았어. 아주 조금 남들보다 비디오 게임을 좋아했을 뿐이지. 그런 것 치고는 형벌이 너무 크잖아. 형에게도. 그걸 늘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부모님께도. 성실함만 보자면 형이 나보다 몇배는 성실한데. 땡전 한푼 안 모여. 부모님도 늘 새벽에 일어나 일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땡전 한푼 안 모여.


그래서 엄마는 오늘 내게 30만원을 보태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거야.


나는 참 운이 좋아 여기까지 잘 왔지. 다행스럽게도 내게 30만원은 너끈히 있어서 바로 드렸지. 그리고 앞으로도 더 노오오오오력해서 계속 더 보태드리고 싶고, 그럴 자신도 있는데. 뭔가 답답하다. 영원히 되물림되는 듯한 가난의 나선. 이 나선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이는 익명의 사람들. 비단 우리 가족만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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