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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y Yang Mar 16. 2024

마지막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점심에 한 시간 쉬었다. 날이 좋아 사무실 근처에 있는 교회 앞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시간 때우다가 오고 싶지 않아서 주어진 일을 했다. HR 매니저에게 사직 이메일을 쓰려고 했는데 하필 월요일까지 안 나온다고 이메일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보스가 어제 시켰는데 못한 일이 어떻게 되었냐고 이메일을 보내와서 그것까지만 이라도 하려고 했다. 백곰에게 물어보러 갔다가 오늘 마지막 나오는 날인데 이거까지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 없다고 그 일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되니 보스에게 가서 먼저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그만둔다고 말해도 이유 같은 것은 물어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공은 당연히 놀라지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이유를 물어보기는 했다. 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답변하고 나도 기회를 주어서 고마웠다고 형식적으로 말했다.


어제와 오늘 나에게 새로 오픈하라고 준 케이스가 9개, 옆 직원이 나간 이후로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다고 생각한 나에게 그 일을 많이 배당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시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전 로펌에서 토할 것 같이 일이 많다고 느꼈는데 여긴 2배 정도 되는 것 같다.

컴퓨터와 서류를 정리하고 책상과 처음에 닦지 못했던 서랍장, 그리고 항상 먼지가 쌓여있었던 정수기 위에 먼지까지 닦았다. 다음에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내가 왔을 때처럼 더러운 곳에서 찝찝하게 시작하지 않기를…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축복하며 잠시 기도했다.


백곰과 인사를 나누며 네가 나의 엔젤이었고, 너의 도움이 없이는 3주도 있지 못했을 것이라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허그하며 인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보고 괜찮냐고 물어보길래 당연히 괜찮다고, job은 또 찾으면 된다고 했다. 백곰은 I’m sure you will!이라고 말해주며 5시까지 있을 필요 없으니 가라고 해서 조금 일찍, 처음부터 여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불꽃처럼 하얗게 불태웠던 3주가 막을 내렸다. 씁쓸하지만 후련하고 마음이 편하다. 남편이 위로밥으로 탕수육과 짜장면을 사준다고 해서 가는 길에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저녁과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사주심. 역시 기분 풀 때는 탄수화물과 당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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