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평생을 아파트에 살다가 초록초록한 정원이 있는 곳에 살게 되니 보기만해도 괜시리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곳에서 해질녘엔 줄넘기를 하기도 하고, 아이는 종종 뛰어놀며 비누방울도 불었다. 기쁨도 잠시.. 그렇게 한달쯤 지났을까, 잔디는 점차 누렇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꽃은 시들어 떨어져버렸고 여기저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정원 한쪽에 자리한 작은 나무들에는 거미줄이 하얗게 둘러졌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원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정원을 즐기기만 했을 뿐 '돌봄'을 전혀 주지 않았다. 아뿔싸.
그제서야 부랴부랴 심폐소생술에 들어갔다. 인터넷으로 잔디 살리는법, 정원 돌보는 법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죽은잔디를 긁어내 정리하고 씨를 뿌리고 비료도 주었다. 마트에 가서 장갑과 삽과 꽃가위를 샀다. 잡초를 뽑고, 거미줄을 걷어내고, 주기적으로 물을 뿌려주었다. 해충이 들지 않게 약을 뿌리기도 했다.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매일매일 미안한 마음과, 소중한 마음을 더해 다듬고 돌보았다. 어느쯤엔가 딸아이와 남편과 함께 정원을 돌보는 시간이 특별한 놀이시간이 되었다. 또 그렇게 한달쯤 지나자 다시 정원은 파릇파릇해지고 생명력이 되살아났다. 그즈음 여름이 오면서 이쁜 수국도 피어났다. 하마터면 이렇게 이쁜 수국을 못볼 뻔 했던 것이다.
정원은 더더욱 소중해졌다. 소중해진만큼 세심하게 보살폈다. 자고 일어나면 창문을 열어 정원의 컨디션부터 확인한다. 문득, 우리의 삶은 이처럼 '나'라는 정원을 돌보는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라면 스스로를 건강하게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를 돌볼 책임이 있다. 건강하게 다루지 않으면 아프고 병이 든다. 신체를 돌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기쁨과 슬픔을 돌보고, 생각을 돌보고, 마음의 상처를 돌본다. 관계를 돌보고, 일상을 돌본다. 소중하게 여기고 세심하게 보살핀다. 그렇게 매일매일 나를 돌볼 수 있을 때, 죽어가는 잔디처럼 누렇게 변해가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건강하게. 푸르게.
마음이 건조해지지 않게 물을 주고, 때로는 빛이 들도록 창을 열어주며, 혹여라도 병들지 않도록 해로운 것, 나를 상처주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나를 살리고 사랑하고 가꾸며 살아가는 일. 그 것이 곧 어른의 삶이다.
# 내가 나의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주는 것
정원 주인이 책임감을 갖고 정원을 돌보듯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돌보아야 한다. 정원은 정원주인이, 아이는 부모가 해준다. 어른은 스스로 한다. 나의 감정, 생각, 관계, 살아가면서 하는 여러가지 선택들에 내가 책임지는 것. 그 것이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사는 방법이며,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다. 오래 전 임제 라는 선사가 전한 성어 '수처작주(隨處作主)' 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모든 곳이 참되다'고 말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내 삶을 참되게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그저 내버려두기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매순간, 나와 내 삶을 닦고 살피며 살아가야 한다.
결코 쉬운 건 아니다. 그렇기에 타성에 젖어살거나, 자신의 중요한 선택을 타인에게 미루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존하면서 사는 어른들도 많다.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못해 계속 아파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데에 한평생을 쓰는 사람도 있다. 그뿐인가. 감정을 책임질 줄을 모르면 주변 사람들이 이른바 '감정 쓰레기통'역할을 하게 되기도 하며, 인간관계를 돌보는 데에 서툴러서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가거나, 혹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일도 더러있다.
나를 돌보는 방식은 부모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어린 날동안 나를 지켜주고 챙겨주고 사랑해줬던 부모를 내면화 시킨다. 때문에 대개 부모가 나를 대하던대로 자신을 대하기가 쉽다. 엄격한 부모 아래에서 큰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자신을 엄격하게 대하기 쉽다. 느슨하게 놓아두면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비난이나 폭언을 자주 했던 부모를 내면화하면 어른이 되어 자기비난의 목소리가 커져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세우거나, 함부로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부모로부터 처음 배우는 셈이다.
그렇다면 따뜻하고 건강한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자신을 건강하게 돌볼 수 있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부모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을 새롭게 습득하는 데에는 더 에너지가 들 것이다. 그럼에도 키가 자란만큼 내면도 커져 있기에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아픈지 아닌지, 행복한지 아닌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는 것. 내면의 결핍이나 취약성을 잘 아는 것도 자신이다. 나에게 절실한 돌봄을 나만이 알 수 있고, 그걸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나'라는 것이다.
때로는 스스로를 다시 양육하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회복하고, 부모가 주지 않았던 것을 제공해주는 어른들을 보게 된다. 나를 위한 선택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관계맺으면서 내가 더 따뜻한 사랑과 관심 속에 살아가도록 하기도 한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건들, 사람들을 새롭게 이해하고 품으면서 더 큰 사람으로 나아간다. 어린시절의 나보다 훨씬 더 큰 성장이 이뤄지는 일들이 어른의 삶에서 일어난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잘 돌본다는 것은 내가 나의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주는 일인 것이다.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요즘 우리집 정원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생생한 초록빛깔을 보여주고 있다. 그 정원에는 가끔 나비가 날아올 때도, 새들이 놀다갈 때도 있다. 그런 정원을 보며 '나'라는 정원을 더 잘 돌보고 가꾸고 싶어진다. 어른이 된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나의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 내 삶을 멋지게 꾸려갈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