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을 마주할 용기
한없이 무기력할 때 '힘 내' 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진심으로 힘을 내길 바라는 마음이 무색하게도 자신에게 닿는 순간 기운이 쭉 빠져버리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 힘을 내야지' 하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은 아래로 꺼져서 지하동굴로 들어가버리는듯한 느낌이랄까.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당시 휴학을 하고 일을 하던 시기였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중이셔서 보호자침대에서 잤던 날 아침이었다. 몸이 피곤해서 더 그랬겠지만 이미 일주일 넘게 이상할 정도로 의욕이 나지 않고, 기운이 쭉쭉 빠져서 내가 도대체 왜이럴까 스스로도 답답했다. 연락이 닿은 친구는 '힘내. 힘이 난다고 생각하면 힘이 나더라' 고 말했다. 친구의 의도는 고마웠으나, 뭐랄까 힘을 내야만 한다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으며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네..'라고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 고민사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주제중 하나가 '무기력'이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녀석이 얼마나 무겁고 지독한지. 어떤 것에도 의욕이 나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게 더 힘들어서, 그냥 차라리 신이 '당신의 무기력을 허락하노라' 하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 때. 그 때에 누군가 '힘내. 기운내. 파이팅!! ' 이라고 말한다면, 상대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힘을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만 남을지도 모른다.
무기력. 해야할 일은 있지만 의욕이 나지 않는 상태. 씻고 먹고 집을 나서는 아주 일상적인 것들이 평소와 달리 너무나 힘들어지는 상태. 이는 우울, 불안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병이다. 아주 옛날, 수렵채집시대에는 무기력이 없었다. 상상해보라. 사냥을 나서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 조금만 더 누워있을래.' 라고 하는 원시인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수렵채집사회의 사람들의 삶은 단순했다. 오직 '생존'.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기 위해 매일 같은 패턴으로 움직여 음식을 구하고, 몸을 뉘일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햇빛이 나면 사냥을 하거나 열매를 따고, 비가오면 나무 아래나 동굴로 들어가 비를 피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었고, 거기에 맞춰 움직였다.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장기적인 계획이라던가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같은 것에 시간을 쓰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돈도 잘 벌어야 하고, 좋은 집도 사야하고, 맛집도 찾아다녀야 하고, 남한테 뒤쳐지면 안되고 행복도 챙겨야한다. 미디어를 통해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잘 사는(것 같은)사람들은 나를 더 불안하게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에 영영 닿지 못할 것 같아 좌절하는 사람들도 많다.
맹수에게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는 원시인의 삶이 오히려 더 무섭고 위험했을텐데, 어쩐 일인지 현대사회가 살아내기에는 더 힘들어보인다. 걱정하고 조바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체감적으로는 더 위험한 환경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불안해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의 나를 자책하는 일도 많다.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지만 몸은 편해졌을지언정 혼란과 스트레스는 높아진 게 분명하다.
그저 생존하기만 되었던 이전에 비해 우리의 머리속은 너무나 복잡하고, 잘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짓누른다.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져 몸을 일으키는 데에는 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단순한 사람이 몸도 가볍다. 어린 아이들은 가뿐하게 일어난다. 그저 살아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더 일찍 일어난다. 삶에 대한 어떤 압박도 부담도 없는 자의 가벼움. 어제의 슬픔이 남아있지 않고, 먼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도 않으므로.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참 잘도 뛰어다닌다. 그렇게 천진무구한 모습으로 뛰어다니던 우리가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을 이고지고 살아가게 되었을까. 모든 아이들이 어느 시점부터 아침에 일어나는게 힘들어진다. 성적도 잘 받아야하고, 부모에게 인정도 받아야 하고, 잘해야 하는 것들이 생겨나면서부터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이쁨받을 수 없는 때부터다.
사는게 호락호락하지 않구나를 느낄수록 머리속은 복잡해진다. 내가 무사하기 위해 많은 것을 계산 해보아야 하는 탓이다. 침대에 누워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지금 당신이 무기력한 건 어딘가에 에너지를 많이 쏟았다는 뜻이다. 스스로는 인정할 수 없겠지만, 아니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자신을 채찍질 하느라 힘을 써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자신을 억지로 끌고 다니느라, 자꾸만 뒤쳐지는 것같은 자신과 싸우느라 기운이 빠져버렸을지도.
평일에는 야근을 마다 않으며 열심히 지내다가도 주말이면 방전이 되서 이불속에서 나오기가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다. 인간의 신체는 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반복되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긴장 상태는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하고, 이완상태는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면서 호르몬 균형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의 많은 사람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긴장상태로 보낸다. 주먹을 꽉 쥔 상태, 승모근이 한껏 올라간 상태로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한계에 다다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탁 풀려버린다. 없는 에너지를 긁어쓰다가 그마저 동이난 셈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못한 이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일어나야 해. 정신차리자' 하면서 다그칠 게 아니라, 몸이 회복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쉬어줘야 한다.
분명히 많이 쉰 것 같은데도 몸을 일으키는 것이 어렵다면 두가지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첫 째는, 나를 짓누르고 있는게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부담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생각 속에서 삶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해내야 하는 것, 잘해야 하는 것이 많고 그 기준이 높다면 당연히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야 할 들이 너무 벅차거나, 내가 아무리 애써도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무력감은 찾아든다. 내가 나 자신을, 또 내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느낌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에 다다를 뿐이다. 머리속에 가지고 있는 짐들을 내려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무엇을 바라고 애를 썼던가?' 질문하며 어떤 생각을 내려놓으면 내 마음이 좀 더 가벼워질 수 있는지 살펴보라. 이미 충분히 내가 내게 준 요구사항들이 나에게 부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그걸 내려놓음으로써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삼아 확인해보자.
물론,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 대한 기대를 낮춘다는 것. 마치 나에게 뒤쳐지도록 허용하는 꼴이 될까봐 겁이 날 것이다. 애쓰지 않고 산다면 모든게 엉망이 되지는 않을까. 형편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상상만해도 끔찍한 기분이 든다면 바로 그 것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면 삶이 피곤하다. 그렇지만 과대평가를 내려놓는 것이 삶을 망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훨씬 잘 흘러갈 수 있다.
엉망진창이 될 용기. 형편없어도 될 자유를 자신에게 허용해보자. 그 것이 오히려 나를 단순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삶의 난이도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너무 높으면, 쉽게 포기하고 싶어진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트랙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저명한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어떤 과제에 몰입하기 위한 조건중 하나로 적당히 어려운 난이도의 과제를 꼽았다. (너무 쉬워도 흥미를 잃는다) 더불어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이어야 한다. 지금 당신에게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는 아닌가.
두번째 시도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자발성의 회복이다. 정말 내 마음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면 나를 저절로 일으킨다. 이득을 셈하지 않고도 그저 집중할 수 있다. 그 것이 곧 단순한 삶이기도 하다. 촘촘히 계획하거나 전략을 세우지 않아도 이미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나를 억지로 깨워야 하고, 일으켜 세우고 끌고 다녀야 하는 삶이라면 당연히 어렵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내 일상을 채우는 활동들이 무엇으로 채워져있는지, 자발적인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자.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사회학자 에리히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간이나마 자신의 자발성을 경험하고 동시에 그 순간을 진정한 행복으로 느낀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자발성의 경험은 대단한 활동이 아니다. 어떤 풍경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 고민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솟구쳐 오를 때 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자발적 체험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 체험이 계속해서 찾아올 때 인간의 삶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찬 어른의 일상이라고 하더라도, 자발적인 경험을 곳곳에 채워넣을 수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또 좋아하는 뮤지선의 음악을 더 깊이 찾아듣는 일. 바깥 풍경이 아름다워 하늘과 나무 같은 것들을 보고 감탄하며 휴대폰 앨범에 부지런히 저장하는 일. 그 것을 소중한 이들과 공유하는 기쁨. 나를 위해 또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하는 일 등, 자발성을 경험하는 즐거운 순간들을 늘려보자. 자발적 활동이 일상의 많은 부분을 채우게 하는 것이 곧 단순한 삶이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매일이 흘러갈 것이기에.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일
그럼에도, 만약 앞의 두가지가 (생각 속 삶의 난이도 낮추기, 자발성의 회복) 전혀 와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무기력에 빠진 이들이 있다면 이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그저 살아있기만 하라고. 만약 당신이 조금도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면 아마 이미 긴시간 애써왔을 가능성이 높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했던 수많은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작은 애씀조차 내려놓고 그저 숨만 쉬고 있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면서 살아있음 그 자체를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인간의 살아있음 그 자체는 바로 호흡이다. 당신은 지금 숨쉬고 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 들숨과 날숨이 내 안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렇게 숨쉬고 있는한 당신은 잘 살아있는 것이다. 그 숨이 결국 당신을 또 살아가게 할 것이다. 당신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사실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존재다.
언젠가 소중한 사람이 번아웃을 겪어 힘들어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적이 있었다. 꼭 어떤 날의 내모습처럼 그렇게 무겁고 캄캄해 보였다. 당시 혹여라도 부담이 될까봐 긴 말을 전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간절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노트에 써두었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이 쓸모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겠지만, '쓸모없는 것 같은 느낌'이 결코 너를 쓸모없게 만들지는 않으므로 안심하고 널부러져 있길 바란다고... 넘어진 김에 쉬다가 자연스럽게 힘이 차오를 때 일어나면 좋겠다고.. 압박 속에서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 얼마 못가 다시 넘어지느니 그냥 강물이 흘러가듯 바람결에 갈대가 흔들리듯 그런 자연스런 몸짓으로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다행히 그 친구는 다시 일어나 정말 강물처럼 흘러가듯 잘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때 노트에 옮겨둔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1mm 부담도 압박도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에 넘어져 이불 속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왕 누워있는거 마음편히 누워있어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주기를. 과거에 이상적으로 그렸던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주기를. 그 것은 곧 무기력을 마주할 용기가 될 것이라 감히 확신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