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프롤로그1
나는 15년 넘게 입시학원을 운영했다. 만삭때까지 불러터진 몸을 이끌고 고3 수업을 했고 아이가 100일이 되자마자 유모차를 끌고 출근을 해서 학원관리를 했다. 아이가 11개월이 되었을 때 어린이집 입소가 가능해졌다. 걷지도 못하고 기어다닐때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고 오전엔 대학원 수업을 듣고, 오후엔 학원에 출근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집에와선 아이 밥을 차려주고, 집안일을 하고, 또 다음 날 대학원 수업준비를 하고, 학원 일을 마무리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간 첫날, 알림장에는 ‘기는 속도가 LTE급입니다’라고 써있었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활발한 아이였다. 호기심도 많고, 붙임성도 많았다. 세상에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것이 보이면 뛰어가서 꼭 확인을 해야만했다.
손을 놓치거나 눈을 잠시라도 떼면 아이는 저만치 멀리 달아나있었다. 자동차와 사람이 뒤섞여 이 길이 인도인지 차도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동네에 살았기때문에 나는 늘 아이가 아파하기 직전까지 아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행여나 아이의 손이 미끄러져서 아이를 놓칠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아이가 호기심 많고 활발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붙들고 늘어져서 몇시간이고 혼자 잘 노는 아이였고 집중력 좋고 몰입도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거 찾아서 몰입하는 성향이 요즘같은 세상에선 참 좋은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늘 질문을 했다.
스스로 납득이 가지 않는 규칙은 지키지 않았다. 아이가 이해하고 납득할때까지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엄마, 근데~,”
“엄마, 이건 왜그래요? 왜 그래야 하는거에요?”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지 않는 규칙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왜?라는 질문을 하는 아이가 대견하고 기특했다. 답해주기가 좀 귀찮더라도, 다른 건 못해줘도 아이의 질문에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답해주려했다. 그렇게 나는 이 아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린시절의 나 역시 세상의 모든 규율과 법칙에 의문을 제기했었으니까. 아무런 의문없이 세상이 정해놓은대로 살아가는 건 억울하다 생각했었다. 늘 궁금해하고 늘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아이는 블럭을 가지고 놀다가도 뜬금없이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고 다시 시크하게 자기가 하던 놀이를 계속했다. 화장실을 가는 길에 자신의 시선 속에 엄마가 들어오면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 호기심 많고, 감정표현에 충실한, 나에겐 사랑스럽기만한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였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아이는 담임선생님께 찍.혀.버.렸다.
목동에서 입시만 10년 넘게 한 나에게 담인선생님은 ‘어머니. 여기 목동이에요~, 다들 입학전에 기본적인 건 배우고 온다는 이야기에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욱!하는 심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학부모는 처음이라... 어찌 대응해야할지를 몰랐다. 늘상 학부모를 응대하는 원장이었지, 내가 학부모였던 적은 없었기때문에.. 그냥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느라 아이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던 사이 아이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었는데, 내가 일을 하느라 아이 마음의 병을 키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억장이 무너졌다. 아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이가 어떤 응어리를 가슴에 안고 버텨왔는지 알게된 날.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냥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에 아이는 고사리만한 손으로 내 뺨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 울지마요. 엄마가 울면 내 마음이 아파요."
"응. 알겠어. 엄마 이제 안울게. 그냥 오늘은 엄마가 너무 미안해서 그랬어. 앞으로는 울지 않을게. 알겠지?"
아이의 작고 따뜻한 품에 내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슈퍼맘이기를 포기하기로.
아이는 엄마가 ‘대장’이니까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원장님’인 것이 아이의 자랑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좋은 엄마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엄마의 무게가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아이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던거 같다.
"원장님 아들은 지금 선행 어디까지 나갔어요?"
"저희 아들은 선행 안해요"
"원장님 아들은 여기서 초등부 다니는거에요?"
"아니요. 저희는 초등저학년 수업은 안해요."
이렇게까지 대화가 이어지면 학부모님들은 의아해했다. 우리 학원이 선행학습을 권장하지 않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원 원장이니까 아이가 어릴때부터 학원을 보낼거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선행학습을 권장하지 않는 이상한 원장이었다. 나는 과도한 선행학습은 돈지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대학입시를 오래 하다보면 알게된다. 어릴때부터 선행학습 빡세게 시킨다고 아이가 나중에 웃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늦게 시작해도 아이가 원하는 시기에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면 아이들은 부스터를 달게된다. 그러면 시간낭비 돈낭비 안하게 된다. 여튼 나는 그런 경영철학,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를 보는 주변의 시선은 달랐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호기심많은 개구쟁이 아이는 의아하다는 듯한 시선을 많이 받았다. 이 시선 속에서,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를 구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는 ADHD진단을 받았다. 소아우울증이라는 의사의 소견도 함께.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기때문에.. 울지 않았다.
속으로만 울었다.
속으로 속으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자연이 반겨주는 곳.
예쁜 산책로와 산들바람. 찬란한 바다가 있는 곳으로 아이와 함께 이사를 왔다.
나에겐 늘 너무나 사랑스러운 ADHD 초딩아들.
나의 사랑스러운 ADHD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