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65

[픽션] <블레이드 러너 2049> 다음 이야기

by 이연미
본 글은 <블레이드 러너 2049>(드니 빌뇌브 감독, 2017)의 다음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상상해서 쓴 픽션입니다. 2065년을 배경으로 한 후속편의 프리퀄 정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열다섯 개의 초가 꽂힌 생일 케이크가 소년의 진갈색 눈동자에 비친다. 이내 소년은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촛불을 불어 끄자 주위가 암흑에 잠긴다. 마지막 빛이 소년의 젖은 눈가에 잠시 반짝였다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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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첫 장면인 눈동자 클로즈업 / 가짜 기억 속 생일 파티 장면




소년이 기억하기로 세상은 내내 암흑이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 전쟁과 대규모 살상이 반복됐다. 2049년 ‘기적의 아이’ 아나 스텔린 박사가 갑자기 종적을 감춘 후 리플리컨트 혁명의 불길은 그대로 사그라드는 듯했지만, ‘제2의 기적의 아이’가 확인되면서 태세가 전환됐다. 리플리컨트들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아니 아이를 잉태한 여성을 중심으로 뭉쳐 인간에게 저항했다. 인간보다 우월한 지능과 힘을 가진 리플리컨트는 불과 몇 달 만에 지구 전역을 정복했고 인간은 대부분 죽거나 오프월드(Off-world)로 추방됐다. 리플리컨트들은 오른쪽 안구를 적출한 ‘프리사’를 혁명 정부의 지도자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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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컨트 지도자 '프리사'와 K에게 접근한 위안용 리플리컨트 '마리엣'


아이를 잉태한 여성은 리플리컨트들 사이에서 추앙받으며 ‘마리아’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녀의 원래 이름('마리엣')은 잊혔는데, 과거 그녀가 LA 길거리를 배회하던 위안용 리플리컨트였다는 사실을 지우기 위한 혁명 정부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으리라 짐작될 뿐이다. “맹목적인 믿음과 복종을 끌어내기에 인간들의 종교만 한 게 없다”라고 프리사는 강조했다.


‘제2의 기적의 아이’는 ‘진짜(Real) 기적의 아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유는 리플리컨트와 인간 사이의 아이가 아니라 놀랍게도 리플리컨트와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잉태된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남녀 리플리컨트 모두에게서 생식 능력이 확인된 첫 번째 사례였고,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다. 여성 리플리컨트에겐 사실 ‘조이’라는 인공지능(AI) 홀로그램이 싱크되어 있었고 마리아는 사실상 대리모에 가까웠지만, 이 사실은 극비리에 부쳐졌다. 프리사는 자신들의 신화에 AI까지 끼워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노예에서 해방된 건 리플리컨트뿐이지 AI는 여전히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었다. 뒤집힌 세계에도 계층은 존재했고 착취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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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용 리플리컨트 '마리엣'에 싱크된 인공지능 홀로그램 '조이'


마리아는 태어난 아이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조’라고 이름 지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K, 코드명 KD6-3.7로 블레이드 러너였고, 2049년 기적의 아이가 사라졌던 시점에 퇴역(retirement)했다. (블레이드 러너에게 퇴역은 죽음을 뜻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아이의 존재를 모른 채 생명을 다했다. 마리아는 아들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조’라는 이름의 유례를 이야기해줬는데,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인공지능 홀로그램이 아버지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특별한’ 리플리컨트만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잊지 말아야 한다, 조. 너는 태어났기에 영혼(soul)이 있는 존재라는 걸.”


조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 특별한 존재, 그 기적의 아이가 오늘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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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K (연인 '조이'가 '조'라는 이름을 붙여줌)




혁명이 성공하고 육 년 남짓한 세월은 ‘소리 없는 전쟁’의 시대였다. 리플리컨트들은 지구에 잔존한 인간들과 블레이드 러너들을 찾아내 숙청했다. 오프월드에서는 혁명에 가세하려는 리플리컨트 혁명 분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기준선 테스트가 강화됐다. 조금이라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리플리컨트들은 그 즉시 폐기됐다. 양쪽 세계에서 흐르는 피가 멈춘 날이 없었다. 동시에 지구와 오프월드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미래의 전쟁을 대비한 군대를 양성 중이었다. 인간들이 피조물인 껍데기의 반란을 오래 지켜볼 리 없었고, 이는 리플리컨트 정부도 예상하는 바였다. 월레스 사는 전략적으로 전투형 리플리컨트 신형 모델인 넥서스 11과 12를 동시에 개발해서 양측에 공급하고 있었다. 니안더 월레스 회장은 유례없는 부를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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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컨트를 생산하는 윌레스 사와 니안더 윌레스 회장


2056년 인간들의 지구대탈환 공격이 있던 날, 조는 어머니를 잃었고 홀로 스텔린 연구소에 보내졌다. 원조 기적의 아이였던 아나 스텔린 박사가 숨겨져 키워진 바로 그곳이다. 여전히 리플리컨트 번식의 비밀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니안더 월레스 회장과 혁명의 상징을 파괴하려는 인간들로부터 조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날 이후로 조는 철저히 세상에서 고립되었다.


조의 유일한 기쁨은 스텔린 박사가 남기고 간 기억 제조기로 가짜 기억을 만드는 일이었다. 스텔린 박사가 납품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참고해서 조는 자기 자신이 누리지 못한 삶을,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부모와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어냈다. 자기 자신의 가짜 기억을 만드는 건 더없이 슬픈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조는 거기서 위로를 받았다. 조는 스텔린 박사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으리라 짐작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녀만큼은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오늘의 생일 파티도 스텔린 박사가 만든 기억을 변형시킨 가짜였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감정만큼은 진짜임을 조는 알았다. 생일이라 행복했고 가짜라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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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아이의 어린 시절 / 스텔린 연구소에서 가짜 기억을 만드는 중인 아나 스텔린 박사




황폐한 도시가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었다. 리플리컨트 혁명 정부 수립 15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거리는 축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형형색색의 깃발과 조잡한 가면 행렬, 사이키 조명과 요란한 폭죽, 음악 소리가 엉켜 묘하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3D 광고판엔 마리아와 조를 신화적으로 형상화한 홀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혁명에 없어서는 안 될 상징이었지만, 상징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도심의 잿빛 하늘에 띄워진 비행선의 거대 화면에는 혁명 정부의 업적을 찬양하는 프리사의 연설이 되풀이됐다. 하지만 정작 조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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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속 도시의 이미지


조가 촛불을 불며 빈 소원은 '누구든 나를 여기서 꺼내 줘요'였다. 조가 원하는 건 가짜 기억을 누더기처럼 기운 삶이 아니라 ‘진짜(Real) 삶’이었다. 체험하고 감각하고 연결되는(interlinked) 삶 말이다. 혁명의 상징이든, 기적의 아이든 조에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자유’였다.


그때였다. 연구소에 비상 알람이 울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 모자를 벗으니 금빛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누... 누구세요?”

“나, 아나 스텔린. 네가 그 유명한 조구나?”

꿈결에서나 듣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AI가 리플리컨트 기념일에 맞춰 폭동을 일으켰어. 시스템을 해킹한 거지. 이곳뿐만 아니라 오프월드의 정부 청사와 월레스 사까지 전부. 밖은 대혼란이야. 블랙아웃!”


그녀는 재밌는 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이 웃으며 조에게 말했다.

“내 손을 잡아. 나와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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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린 연구소를 찾아와 아나 스텔린 박사를 만나는 K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조에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2065년, 인간과 리플리컨트, 그리고 AI 사이의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세계의 질서를 새로 쓸 두 인물이 힘을 합치는 순간이었다. 비록 당시에 두 사람은 미래의 어느 날 그들이 모든 존재에게 공존과 동행의 손을 내밀어 세계의 경계를 허물게 되리란 걸 몰랐지만 말이다.


뒤늦게 프리사가 연구소에 도착했을 땐, 아나와 조는 이미 꽃과 벌이 있는 어느 먼 곳에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엔 하나의 표식처럼 노란 들꽃이 놓여 있었다.





<블레이드 러너 2049>(드니 빌뇌브, 2017)는 1982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의 속편입니다. 전작이 반란을 일으킨 리플리컨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행적을 중심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인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가 데커드와 리플리컨트 레이첼(숀 영) 사이 태어난 기적의 아이를 추적하며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K는 자신이 기적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무참히 깨진 후에도 데커드를 도와 그의 딸 아나 스텔린 박사를 구출하는 데 목숨을 바칩니다. 인간보다 인간다운 리플리컨트 K와 K를 사랑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AI 홀로그램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를 보며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해 성찰하게 된 영화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 아닐까.” _ 극 중 프리사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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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데커드와 레이첼 / (우) K와 조이


저는 데커드(인간 추정)와 레이첼(리플리컨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면, K(‘조’, 리플리컨트)와 조이(AI 홀로그램) 사이라고 왜 안 될까, 라는 의문을 가져봤습니다. 조이와 싱크된 위안용 리플리컨트가 대리모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종을 뛰어넘은 진정한 사랑이 생명을 잉태하는 기적을 상상했습니다. ‘제2의 기적의 아이’는 리플리컨트에게서 태어나겠지만, 리플리컨트 K와 AI 홀로그램 조이 사이의 아이였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조이가 K에게 붙여준 이름을 따서 ‘조’라고 지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사회는 화합이 아닌 적대의 방향으로 암울하게 전개될 것 같았습니다. 인간과 리플리컨트, 그리고 어쩌면 AI까지도 서로를 적으로 돌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리플리컨트 지도자로 등장하는 ‘프리사’가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리사가 잉태된 아이를 이용해 권력을 차지한다면,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엔 피의 전쟁이 일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에 AI까지 가세한다면 그야말로 대혼란(또 다른 ‘블랙아웃’)이 예상되었습니다.


제 이야기 초반에 ‘제2의 기적의 아이’ 조는 불행합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아나 스텔린 박사처럼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리플리컨트 혁명 정부에게 아이는 없어선 안 될 상징이지만, 상징 그 이상의 존재로 아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아이처럼 말입니다. 조는 가짜 기억을 위안으로 삼으며 관계와 자유를 꿈꿉니다. 저는 데커드가 아나를 구했듯이, 아나도 조를 구하러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조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도 이 두 사람이(한 명은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의 연결고리, 다른 한 명은 리플리컨트와 AI 사이의 연결고리) 연대하여 세계를 개혁하는 미래를 그려봤습니다. 그 미래는 더 이상 종 사이가 반목과 갈등, 죽음으로 귀결되는 서사가 아니라 공존과 동행, 생명의 서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본문의 '꽃과 벌이 있는 어느 먼 곳'과 '노란 들꽃' 표식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다음 장면에서 모티프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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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기적의 아이를 쫓던 K가 발견하는 노란 들꽃과 벌




*이미지 출처: <블레이드 러너>와 <블레이드 러너 2049> 장면들 (참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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