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협약

[픽션] 김초엽의 <오래된 협약> 다음 이야기

by 이연미
본 글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한겨레출판, 2021)에 수록된 단편 <오래된 협약>의 다음 이야기를 자의적으로 상상해서 쓴 픽션입니다.


노아에게.

벨라타에 다시 오기까지 무려 이십 년이 걸렸네요. 벨라타인들에겐 한 세대에 가까운 긴 시간이 흘러버린 걸 테죠. 하지만 저희 최초 탐사대가 예정되어 있던 다섯 군데의 행성 탐사를 세 군데로 줄이면서까지 여정을 서둘렀음을 노아 당신은 알아주리라 믿습니다. 저희는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벨라타와의 정식 교류를 제안했습니다. 한때 푸른 행성을 공유했던 자매들이라고 설득했지요. 탐사대의 마음과 달리 지구에선 미지의 행성과의 교류를 승인하기까지 여러 절차가 필요했기에 시간이 이렇게 지연되고 말았네요.


벨라타에서 보낸 두 달의 기억과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가 지구와 벨라타의 새로운 협약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놀랍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아 당신이 이뤄낸 벨라타의 변화를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벨라타는 지금, 언젠가 당신이 제게 추천했던 그 찬란한 여름입니다. 당신 말이 맞네요. 벨라타의 여름을 보지 않고는 이 행성을 다녀갔다고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묘한 파스텔색이 어우러진 하늘과 그 하늘에 떠 있는 하얗고 커다란 낮달은 어떤 화가도 화폭에 담지 못할 정도로 신비롭습니다. 우리가 거닐던 해안가의 바닷모래도 제 기억 속의 빛깔보다 한층 다채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보았던 여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일 테죠. 아름다운 풍경 위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역동하고 있으니까요. 벨라타는 더는 정적이고 고요한 행성이 아닙니다. 행성 전체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모두 노아 당신의 연구와 용기 있는 행보 덕분이겠죠.


사실 벨라타를 떠난 후 저희 탐사대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보인 벨라타인들의 적대심은 위협적이기까지 했으니까요. 지구 탐사대가 발견한 불편한 진실이 당신들에겐 그저 신에 대한 모독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브에 대한 금기를 깨야 한다’는 제 말을 종교 비판으로 왜곡하지 않고 벨라타를 향한 애정과 연민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노아 당신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벨라타인들의 짧은 생애가 안타까웠습니다. 당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과학적인 해답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것은 지구가 벨라타보다 문명과 기술이 우월하다는 데서 기인한 오만한 구원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지성과 논리를 신봉하는 과학자로서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진실은 너무나 가혹해서 차라리 덮어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는 걸 알기에 저희는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한 채 벨라타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아 당신이 제게 보낸 편지가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어렵게 고백한 진실 앞에서 어떤 답장을 써야 할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을 존중하는 마음과 구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제, 앎이 아닌 무지가 구원이라는 과학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편지에서 당신이 그 모순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막연한 느낌을 받았고, 저희의 지성에 도움을 받아 벨라타인들을 구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진실을 편지에 적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썼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이 당신에겐 모욕으로 들리더라도 부디 끝까지 읽은 후에 판단을 내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면서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가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사연부터 얘기했습니다. 그 바로 며칠 전에 저는 탐사대 대표로 당신들의 대사제를 만나 두 달 동안 연구한 과학적 사실들을 증거자료와 함께 전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이미 얘기했듯이, 행성의 대기에 분포된 루티닐은 뇌의 손상과 생명 단축을 초래하며 오브에 포함된 성분을 섭취하면 이 유해 물질을 분해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당신처럼 그분도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단박에 우리가 밝혀낸 진실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과 태도에서 저는 신과 금기, 약속을 넘어선 어떤 어두운 내막이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편지에서 당신은, 사제들의 수명은 보통 사람들보다 길다고 했지요. 당신은 너무나 순수해서 그것에 조금도 의혹을 품지 않았던 듯 보입니다. 대사제와의 만남 이후 저희는 사제들에게 공급되는 식사에 소량의 루티닐 분해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물론 오브에게서 온 것이고요. 행성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오브이지만, 누군가 그것을 독점하고자 했다는 건 충격적이었습니다. 노아 당신이 언급한 오브와의 오래된 협약은 아름다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루티닐의 환각 작용을 이용해 사제들에게 주입하는 것이었죠. 벨라타인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지도자들의 통치 수단이었던 겁니다. 그들은 제가 그 비밀을 당신에게 알릴까 봐 우리가 만나지 못하도록 분리 조치했던 겁니다.


저는 여기까지의 제 얘기가 당신 신념의 근간을 흔드는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좌절하고 슬퍼하는 노아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단지 폭로에 그치는 것이었다면 저는 당신께 편지를 부치지 않았을 겁니다. 오브에 대한 금기를 완전히 깨지 않고도 사태를 개선할 방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야 했습니다. 저희 연구자들은 오브의 표피를 채취해서 인공적으로 배양하는 기술을 찾아냈습니다. 편지의 말미에 공유한 이 기술은 당신에게 대단히 희망적인 소식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사제인 당신은 오브에 접근 가능했고, 연중 특정 기간에 오브가 자연스레 탈피한다는 사실을 알아내 표피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오브의 탈피는 마치 지구의 동물이 털갈이를 하는 것이나 곤충이 허물을 벗는 것, 식물이 잎을 떨구는 것과 비슷한 듯했습니다.


이어진 편지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오브의 표피를 채취하는 것과 탈락한 껍질을 채집하는 것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요. 비록 오래된 협약이 조작된 것이고 벨라타의 신앙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오브에 대한 금기를 완전한 무(無)로 돌릴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벨라타인들이 당신처럼 혼란에 빠지는 것을 노아 당신은 원치 않았죠. 저는 당신이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의 편지를 더 주고받으며 함께 기술을 발전시켰고, 당신은 결국 표피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루티닐 해독제를 개발해냈습니다. 수백 년 이어온 신앙과 규율은 지키면서도 진보를 꾀한 것이지요. 당신은 몰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오브를 활용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수용 가능한 방안을 연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해독제를 섭취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점차 늘어났고, 최근 벨라타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출생자는 앞으로 40세를 넘겨 생존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오브의 표피만을 채집했음에도 대기 중의 유해 성분이 확연히 줄어들어 생명들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은 부차적이지만 바람직한 변화였습니다. 생물들의 활동은 오브의 개체 수 조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요. 그렇게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벨라타는 본래의 살아 숨 쉬는 행성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노아 당신이 제게 선물한 벨라타의 모래가 담겼던 유리병에 넣어 바다로 떠내려 보낼 겁니다. 당신이 평생 꿈꿨던, 벨라타인과 오브가 함께 하나의 행성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일이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편히 잠드십시오.

당신의 지지자 이정으로부터.






김초엽 작가의 <오래된 협약>(<<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은 벨라타 행성의 사제 ‘노아’가 지구 탐사대 ‘이정’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된 소설입니다. 노아와 이정은 벨라타에서 두 달 동안 흥미로운 지적 공유의 시간을 보냈지만, ‘오브에 대한 금기’를 놓고 지구 탐사대와 벨라타인들 사이 갈등이 생기면서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별을 아쉬워한 노아는 이정에게 편지를 보내고, ‘오브와의 오래된 협약’이라는 벨라타 행성의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벨라타인들은 오브와의 협약을 통해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정에게 언젠가 벨라타의 여름을 다시 찾아주기를, 그때는 어쩌면 깨어난 행성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_ <오래된 협약>. p.218


제 이야기는 ‘신을 믿지 않는 사제’, ‘무지가 구원이라는 과학자’의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노아에 대한 연민에서 시작했습니다. 노아가 모순을 딛고 벨라타인들을 구원할 묘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이정의 답장이 어쩌면 그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구 탐사대의 일원인 이정을 신과 금기, 협약(기원 신화)보다는 이성과 논리를 신봉하는 합리적인 과학자로 추측했습니다. 진실을 고백하는 노아의 용기 있는 편지에 만약 이정이 답장을 쓴다면, 그도 진실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가혹한 진실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노아라면 신앙(오래된 협약)과 과학을 적대적으로만 여기지 않고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에 행성의 생명들을 되살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생명들로 생동하는 살아 숨 쉬는 벨라타를 그려보고 싶었고 벨라타의 여름을 이정이 꼭 목격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이 이야기를 쓰도록 했습니다.

부디 이 글이 원작자의 세계관에 해가 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원작의 감흥과 여운이 깊어 독자 스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새롭게 상상한 것으로 너그러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떠나온 세계.jpg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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