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연미 Mar 04. 2024

우리가 어떻게든 관계를 끊고 살아

권여선의 <사슴벌레식 문답>(2023)을 읽고


   권여선의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에는 대학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만난 네 명의 친구가 나온다. 언니처럼 믿고 의지할만하지만 할 말은 하는 성격의 ‘부영’, 상냥하고 순진한데 충동적인 면이 있는 ‘정원’, 침착하고 인내심이 강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경애’, 그리고 무분별하고 분방한 생활을 즐기는 응석받이 ‘나(준희)’. 한때 서로의 생일을 결사적으로 챙길 정도로 가까웠던 이들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엇갈리고 끊어진 관계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비슷하진 않지만 내게도 죽고 못 살 것처럼 붙어 다니던 한 무리의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무려 십년지기였지만, 지금은 그중 대부분이 연락이 끊겼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한두 명뿐이다. 소설을 읽으며 그 시절의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쇼핑하고 함께 여행을 떠났던, 함께하는 게 당연했던 우리. ‘우리는 어쩌다가 멀어졌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자 이내 아득해졌다. ‘우리는 어떻게든 멀어져.’라는 사슴벌레식 답변이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울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제목이 된 ‘사슴벌레식 문답’은 삼십 년 전 네 명의 친구들이 떠난 강촌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방충망이 있는데도 사슴벌레가 방안에 들어온 것을 발견한 친구들은 숙소 주인에게 어디로 들어오는지를 물었고, 주인은 ‘어디로든 들어와.’(p.20)라며 꽤나 명쾌한 답변을 해줬다. 이후 이들은 이 같은 표현방식에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p.21)이라고 이름 붙이고 재미 삼아 다양하게 활용했다.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끊고 사냐? 우리가 어떻게든 관계를 끊고 살아.’,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니가 어떻게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에 홀로 참석한 ‘나’는 정원의 자살과 경애의 변절, 그리고 부영의 상처로 얼룩진 그들의 관계를 되짚어보며 사슴벌레식 문답의 숨은 뜻을 뒤늦게 발견한다. 처음엔 ‘의젓한 방어의 멘트’(p.27) 같았던 사슴벌레식 문답은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p.27)이 숨겨진 표현으로, ‘막막한 절망의 표현’(p.35)으로 매번 다른 뉘앙스를 품은 채 해석된다. 그리고 괄호에 넣어두었던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그대로 과거의 기억 속에 갇힌 ‘나’의 형상이 되고 만다. ‘나’는 경애가 불면에 시달릴 때도, 정원이 연극판에서 힘들어할 때도, 부영이 경애의 배신에 분노할 때도 제대로 묻고 답을 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p.37)     


   어쩌면 질문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든’이라는 한 글자 어미만 붙이는 그 도돌이표 같았던 문답은 관계를 끊는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에 ‘어떻게든 되겠지.’와 같이 답하는 것은 낙관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사태를 방관하고 답변을 회피하는 말로 들린다. 뉘앙스에 따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상관하지 마.’라고도 들린다. 이런 말을 들으면 상대방은 서운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할 것이다. 관계에서 상대방을 소외시킴으로써 스스로도 소외되는 단절과 고립의 말이다.   



  

   소설에서 곁길로 빠지는 듯하지만, 나는 문득 신화 속 ‘메아리’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멀어졌나?’라는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든 멀어져.’라는 메아리가 머릿속에 울렸을 때 말이다. 신화의 내용은 이렇다. 에코라는 요정이 있었는데 말이 많은 게 단점이었다. 어느 날 에코의 수다가 헤라의 일을 방해한다. 분노한 헤라는 에코에게 ‘남보다 먼저 말할 수 없는 저주’를 내린다. 저주를 받은 에코가 산에 숨어든 것이 바로 메아리다. 어쩌면 ‘사슴벌레식 문답’은 자신의 언어를 빼앗기고 남의 말만 반복하는 메아리의 저주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빙글빙글 돌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는 점까지도.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이미지 출처: pexels

매거진의 이전글 다음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