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인문 기행>(서경식, 반비, 2024)을 읽고 (1)
‘아메리카’란 무엇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아메리카’는 단일한 어떤 곳이 아니라, 여럿이 서로 갈등하고 항쟁하는 복수의 문화가 부딪히는 ‘장(場)’일 것이다.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며, 동시에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 모순과 항쟁이야말로 ‘아메리카’이리라.(p.260)
故 서경식 교수의 인문 기행 시리즈 마지막 여정은 ‘미국’이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반비, 2024)을 책으로 출간하며 그는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맺음말을 썼다. 그에 따르면, 이 책은 ‘선한 아메리카’를 향한 작가의 애착과 기대가 낳은 산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술 순례를 통한 인문학적 성찰은 전쟁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에서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p.262) 그가 제시하는 방안이다.
한 나라의 인상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건, 개인의 경험이다. 체험적 기억은 그에겐 하나의 단단한 진실로 자리 잡는다. 서경식 교수는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절망적이던 시절(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두 형이 양심수로 수감된)에 미국을 방문했고, 선한 미국인들의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의 행보, UN의 기능 상실, 전쟁의 확산 등을 겪으며 비관적 예감에 시달리면서도 그가 ‘선한 아메리카’의 가능성과 희망을 놓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반대로 나는 ‘선한 아메리카’에 회의적인 사람이다. ‘선한 아메리카’라는 관념은 과거 이민자들이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며 부르짖던 ‘아메리칸 드림’과 마찬가지로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허황된 기대이자 배신당할 약속이다. 미국을 두고 ‘세계의 경찰’이라고 하는 것도, 미국인들이 ‘세계 시민 의식’을 가졌다고 하는 것도 허위고 가식이다. 다소 편협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나에게는 체험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미국은 서경식 교수의 그것과 크게 달랐다.
나는 2001년에 뉴욕에 2개월 정도 머물렀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고 어리다면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나는 단순 여행자에 비해 미국의 실체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이유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외가 친척이 뉴욕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난 거나 다름없는 이민자 2세였는데, 미국인(뉴요커)이라는 자부심과 당당함을 드러내며 나에게 선진 미국의 부(富)와 문화, 자유분방함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뉴욕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산다는 센트럴 파크 앞 빌딩(로비에 안내원이 있고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개인 소유의 집 한 채였다)에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뉴욕의 가장 크고 유명하다는 나이트클럽에도 가보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그녀의 기대와 달리 충격과 비애에 더 가까웠다.
특히 나이트클럽은 컬처 쇼크(Culture Shock)였다.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호화로웠으며 사람들로 붐볐지만, 내가 받은 충격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우선 입장할 때 남녀가 따로 줄을 서서 신발을 벗고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여자 경호원이 머릿속과 속옷 안쪽까지 만지면서 검사해서 무척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 나라는 마약이 흔하니까 단속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클럽 안에 들어가니 연기로 흡입하는 것부터 알약까지 각양각색의 마약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철저한 수색은, 이해가 쉽게 말하자면 ‘외부 음식 반입 금지’와 같은 조치였던 것일까. 그곳에서 나는 창밖으로 뛰어내리려는 남성도 목격했고(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들숨과 날숨이 짐승(짐승에게 미안한 표현인데)의 숨소리 같던 여성 앞에도 앉아 있었다. 사실 가장 어이없었던 건, 그 넓은 공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어 있다는 거였다. 스테이지 바로 앞은 백인과 흑인이 차지하고, 뒷공간의 한쪽은 중국인, 다른 한쪽은 한국을 포함한 나머지 아시아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내가 몰라서 그렇지 더 세분되어 있었을 것 같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인데, 이민자들이 자연스럽게 섞이지 않는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내 사촌은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미국 사회에선 마이너리티 지위에 있는 이방인이었고 평생을 그 모순과 투쟁하며 살아온 듯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경식 교수가 말한 것처럼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의 혼란과 ‘자기 분열의 아픔’(p.243)을 겪고 있었던 것도 같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고 연민의 감정이 들지만, 당시엔 그녀의 허세와 모순적인 태도, 극단적인 감정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끼기 위해 억지 노력을 하고 있었고(부유한 미국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명품 매장에 가면 손수건이라도 사서 나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겉도는 처지에 있었으며 그래서 인종차별에 극도로 민감했다.
하루는 이른 아침을 먹기 위해 뉴욕 시내의 어느 레스토랑에 갔다. 우리가 첫 손님인지 종업원이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잡은 후에도 메뉴판을 아주 느릿느릿 가져왔다. 사촌은 메뉴를 보면서 상세한 요구사항을 덧붙여 주문을 했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벌떡 일어나더니 내 팔을 붙들고 가게를 나가자고 했다. 인종차별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동양인을 첫 손님으로 받기 싫어 일부러 주문을 천천히 받으러 온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이것도 나는 사촌이 종업원에게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는 걸 들으며 파악해야 했다. 돈은 당연히 내지 않았고 사촌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주먹으로 벽을 한 방 치기까지 했다. 내가 당한 게 인종차별인지도 몰랐던 나는 얼떨떨했고, 아무리 그래도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건 뭔가 싶어 황당했다. 한편으론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불평등과 차별을 겪었기에 이토록 예민해진 촉수를 갖게 되었을까 싶어 그녀가 안쓰러웠다.
내가 경험한 ‘아메리카’는 절대 선하지 않았다. 뉴욕의 사촌 덕분에 우연히 엿보게 된 미국의 민낯은 오만하고 차가웠다. 위에 나열한 일들은 주관적이고 단편적이지만, 미국의 진실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미국을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재하는 자유의 나라라고 할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베풀 듯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서도 우월의식이 느껴져 거부감이 든다. 이후로도 두세 번 미국을 더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도무지 나는 미국에 너그러워지지 않는다. 예술을 들이밀어도 마찬가지다. 나는 ‘선한 아메리카’처럼 미국의 예술이 지닌 위상도 거품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짧은 역사에 대한 열등감을 보완하기 위해 마케팅(자본력)과 미디어를 활용해 의도적으로 띄운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선한 세계’를 짓기 위한 인문학적 사유는 분명 필요하지만, ‘선한 아메리카’에 기대어서는 더 큰 절망감만 낳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뉴욕에 머물다 서울에 돌아온 지 불과 십여 일 뒤에 9.11 테러가 발생했다. 테러 이후 미국은 더욱 자국 우선주의, 반(反)이민 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는 그날 ‘선한 아메리카’에 걸었던 세상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