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키즘과 Lady A
JFK8 마지막 편을 올리기 전에 글로 써둬야 할 소재가 또 생겼다. 사실 조금만 부지런히 지내다 보면, 신문만 열심히 읽고 뉴스만 틀어놓고 지내도 글감이 알아서 쌓여 이내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동안 글감을 잘 모으지 못한 건 어쩌면 다 내 게으름 탓일지 모른다. 물론 나는 내 탓이 아니라고 우기며 너무 빨리 돌아가는 세상을 탓하고 있지만. 원래 성은 방귀 뀐 놈이 내는 거니까 내가 내도록 하겠다.
느릿느릿 사는 중에도 부랴부랴 써야겠다 마음먹게 한 오늘 글의 소재는 팟캐스트 아메리카노 시즌3 첫 에피소드를 녹음하던 중에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여기서 잠깐, 아직 아메리카노를 모르시는 분, 이름은 들어봤지만 안 듣고 계신 분들은 팟캐스트 구독부터 부탁드린다. 지난주에 세 번째 시즌을 시작했는데, 엄청 재밌고 유익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https://americaknow2020.com/2022/04/24/careerandfamily1/
첫 에피소드의 책 "커리어 그리고 가정"의 저자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의 박사 논문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앤테벨럼 시대(Antebellum Era)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앤테벨럼 시대는 미국이 영국과 독립전쟁에서 이겨 독립을 확정받은 1812년부터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까지의 시기를 뜻한다. 노동경제학과 경제사를 전공한 골딘 교수는 앤테벨럼 시대 남부의 산업에 관해 쓴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기까지는 골딘 교수에 관한 위키피디아나 구글 스칼라만 검색해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앤테벨럼이란 가수도 있지 않았나요?"라고 운을 뗐다.
"어? 누구였죠? 밴드 이름이었던가요? 저도 들어본 것 같은데..."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이럴 게 아니라 한 번 찾아보죠."
대중문화에 대한 우리 부부의 얕은 지식과 뻔한 감수성은 팟캐스트 두 시즌을 거치며 여실히 드러났다. 가십걸을 본 적이 없어서 'XOXO~~'를 몰랐던 게 대표적이다.
"찾았다! 아, 그냥 앤테벨럼이 아니라 레이디 앤테벨럼이네요."
"맞아요. 저도 기억나요. 근데 노래는 또 뭐가 유명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뭐더라... 아, 찾았다! 이 노래 딱 하나 알겠어요. "I run to you"라는 노래요."
끝내 정확한 기억은 떠올리지 못했지만, 아마도 우리가 컨트리뮤직의 성지 내쉬빌에 살 때 이 밴드가 참석하는 콘서트에 갈 뻔한 적이 있던 것 같다는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넘어갔다. 농담을 많이 주고받는 팟캐스트가 아니라서 혹시 모를 청취자들의 지루함을 덜어드리고자 실없는 드립들을 살리려고 이 가수에 관해 스무고개 하듯 이야기를 나눈 부분을 듣기 좋게 편집해놓고, 그나저나 앤테벨럼 시대가 뭔지 그제야 검색을 해봤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꽤 흥미로웠다.
Antebellum은 라틴어인데, Ante는 라틴어로 이전이라는 뜻이고, Bellum은 전쟁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Antebellum은 전쟁 전이란 뜻이고, 미국사에서 전쟁은 내전(Civil War)이었던 남북전쟁이다. 그래서 앤테벨럼 시대는 1812~1865년을 가리키는데, 이때는 미국 남부에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남아있던 때다. (구글에 Antebellum Era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Antebellum South라는 제목 아래 이때까지 남아있던 남부 노예제에 관한 설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노예제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물론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기까지 100년이 걸렸고, 민권법이 제정됐다고 인종차별이 사라진 건 전혀 아니지만, 어쨌든 앤테벨럼 시대는 피부색에 따라 다른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할 수 있게 법이 보장하던 시절이었다.
한 시대를 지칭하는 표현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을까? 최근 미국에선 그럴 수 없다는, 그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넓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지 플로이드 씨의 사망 이후 전국적으로 번진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Black Lives Matter)" 시위와 함께 미국 사회에 여전한 구조적인 인종차별의 그림자와 그 뿌리를 직시하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앤테벨럼 시대는 대표적인 타깃이 됐다. 노예제라는 전근대적인 제도가 남아있던 시절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면 적어도 그 시대가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었을지 똑바로 이해하는 게 먼저라는 주장이 호응을 얻었다.
여기서 레이디 앤테벨럼의 이름도 문제가 된다. 2006년 내쉬빌에서 그룹을 결성했을 때는 별 문제가 안 됐던 이름이다. 사실 밴드 멤버들이 직접 해온 설명을 보면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이름도 아니다. 밴드를 결성하고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던 중 하루는 19세기 남부의 전형적인 농장 저택에서 화보를 촬영했는데, 앤테벨럼 남부 건축 양식이 멤버들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누군가 앤테벨럼이란 단어가 입에 잘 붙지 않느냐며 밴드 이름으로 짓자고 제안했고, 멤버 가운데 한 명이 여성이 있으니 그냥 앞에 레이디를 붙이자고 해서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 레이디 앤테벨럼이었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시위가 한창이던 2020년, 앤테벨럼이란 단어가 내포한 의미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밴드는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2020년 6월 11일에 올린 인스타그램 포스팅에서 밴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설명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가 밴드 이름을 지을 때 그 단어와 연관된 남북전쟁 이전의 역사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노예제가 존재했던 역사를 말이죠. 이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분께, 안전에 위협을 느끼고 소외당하고 묵살당한 것처럼 느끼셨을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레이디 앤테벨럼은 2020년 6월부터 앤테벨럼을 A로 줄여서 Lady A가 됐다. (지난 20년간 Lady A라는 별칭을 쓰며 활동해온 래퍼 애니타 화이트(Anita White)와 이름의 상표권을 두고 법정 다툼을 벌였는데,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레이디 앤테벨럼의 사례는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전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워키즘(wokism)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문화전쟁은 붉은 바다와 푸른 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앞으로도 자주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깨우다는 뜻의 동사 wake의 과거형인 woke는 다른 말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의, 특히 인종차별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 늘 깨어 있다는 뜻의 형용사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워키즘은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뒤 보수 진영이 틈만 나면 입에 올리는 무언가가 돼버렸는데, 이를 538에서 이를 잘 설명해놓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지적하는 진보 진영에서 "늘 깨어있자"는 취지로 "stay woke"라는 구호를 붙이기 시작한 게 이 말의 유래라는 점이다. 그런데 보수 진영에서 저 말에 "극단적인 인종차별 반대운동", "백인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 "미국을 부정하는 세력"과 같은 안 좋은 딱지를 다 갖다 붙이면서 워키즘의 외연은 (안 좋은 쪽으로) 끝없이 넓어졌다. 예전에 가수 양희은 씨가 "노래는 만들어 처음 부를 때까지만 내 노래지, 발표하고 대중의 품에 가면 그때부터는 그 노래를 듣고 즐기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원래는 구조적인 인종차별을 잊지 말자며 만든 말이 보수 세력이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이들, 싫은 대상을 한데 묶어 조롱하고 폄하하며 비난하는 용어로 쓰이게 됐다.
지난 주말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르펜보다 더 극우 성향의 막말을 일삼으며 인종차별주의자 르펜을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한 에릭 제무도 '워키즘'을 이야기했다. 전 세계 극우 세력의 대동단결인가. 한국 보수 세력도 이제 '종북좌파 몰이'가 잘 안 먹히면 워키즘으로 갈아타면 되겠다. 여성이 구조적으로 차별받아왔다는 '불순한 주장'을 하는 '남성 혐오론자'들도 워키즘에 물든 주적 목록에 있으니, 공격할 대상은 어렵잖게 찾을 수 있을 거다.
538의 기사는 벌써 1년도 더 지난 2021년 3월에, 보수 진영의 연례행사인 씨팩(CPAC)을 보고 나서 쓴 기사다. 딱히 무언가를 예측할 생각은 없다고 기사에 썼지만, 놀랍게도 정확히 맞춘 게 하나 있는데, (트럼프가 장악한) 공화당이 입만 열면 워키즘을 말하며 문화전쟁에 올인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트럼프가 또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많지만, 그래도 일단 잠룡이 되고 싶어 하는 이무기들 치고 문화전쟁에서 전공을 세우지 않으려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Lady A를 여전히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아 보인다. 약자로 줄인다고 원래 의미를 사람들이 모르겠냐는 지적부터 얄팍한 수를 쓰는 가식이라는 비난도 있다. 그래도 어쨌든 밴드 이름이 줄 수 있는 잘못된 메시지를 인식하고 나서 뒤늦게나마 이름을 바꾼 건 용기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나도 레이디 앤테벨럼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란을 모르던 상태에서 가볍게 주고받은 대화를 방송에서 뺐다. 아메리카노 최초의 자기 검열이었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적어도 문제를 보고도 이를 억지로 외면하거나 오히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행동이라고 믿는다.
붉은 바다와 푸른 섬의 기싸움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붉은 바다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적을 상정하고 벌이는 섀도 복싱처럼 보이기도 하는 문화전쟁 이야기는 앞으로도 할 게 많다. 실은 모아놓은 글감들이 몇 개 더 있는데, 예를 들어 저 위에 글 썸네일 사진에 등장한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디즈니와 벌이는 다툼, 보수 세력의 금서 지정 운동, 낙태 권리를 둘러싼 법정 다툼까지 서로 연결된 이야깃거리가 많다. 올해 11월 있을 중간선거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될 내용들이니 부지런히 다루고 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