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주디 Apr 25. 2023

아기와 함께 한 제주 보름 살이 - 후기 편

벌써 제주살이를 다녀온 지 몇 개월이 흘렀다. 대부분의 기억이 가물해지고 남아있는 기억마저도 미화되어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느껴질 만큼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 순간을 되짚어보고 제주살이의 좋았던 점을 공유하고 싶어서 적어 본다. 또 이 당시를 조금도 기억 못 할 우리 아기를 대신하여 엄마가 쓴 일기랄까. 아기가 자라서 글을 읽고, 감상에 젖을 나이가 되면 꺼내주고 싶어서 남겨 둔다.



자연 가까이에서 쑥쑥 자란 아이



제주살이를 한 2주 동안 별 다른 일정 없이 우리는 늘 마당 앞에서 놀고, 주변을 산책하고, 근처에 있는 멋진 자연경관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제주에 오기 전 아기의 삶은 '장난감이 가득한 집, 아파트로 가득한 동네, 종종 가는 키즈카페'가 대부분이었다. 제주도는 우리 부부에게도 큰 해방감을 주었는데 아기에겐 그 충격이 더 컸나 보다. 아기의 옹알이나 몸짓, 표정, 감정표현 등 모든 것이 더 생생해지고 달라진 것을 느꼈다.


아기는 유독 제주의 강한 바람을 좋아했다. 가끔은 나조차도 휘청일 것만 같은 강한 바람에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기가 바람에 쓰러져 넘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다. 아기는 생각보다 강했다. 바람에 맞서서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두 다리를 힘차게 바닥에 내딛고 서 있는 것을 즐겼다.


나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길가에 핀 들꽃에도 아기는 잊지 않고 관심을 주었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모래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즐거워했다. 구멍이 뽕뽕 뚫린 현무암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툭툭 건드렸다. 모든 것이 아기에겐 새로운 자극이었다. 이전보다 자주 흥겨움에 춤을 추고 활짝 웃어 보였다.


아기의 즐거움보다 우리의 쉼을 먼저 생각했던 제주살이에서 생각지도 못한 걸 얻고 갔다. 아기의 눈부신 성장에 우리 부부는 너무 놀랐다. 자연과 가까이에서 살아야 함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멋진 가족사진이 한가득



핸드폰엔 이미 아기 사진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집에서 찍은 거다 보니 배경이 지저분하거나 피사체는 늘 아기뿐이었다. 가족이 함께 한 사진은 찾기 어려웠다. 나는 종종 아기와 남편의 모습을 함께 담기도 했지만 내 사진첩에 내 얼굴을 찾기는 힘들었다.


남편과 나는 제주에서 셀프로 웨딩촬영을 했을 정도로 삼각대 촬영에 달인이다. 제주에 간 김에 우리는 아기와 함께 셀프 촬영에 도전했다. 숙소 앞 골목에서, 함께 간 카페에서, 모래사장에서 많은 사진을 남겼다. 그렇지만 완벽한 사진을 얻기에는 역시나 어려웠다.


남편은 이를 예상하고 미리 스냅 촬영을 예약해 두었다. 우리 제주살이에서 숙소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정해둔 일정이었다. 마침 남편의 지인이 제주에서 스냅 사진을 전문으로 하고 있어서 예약했다.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였다. 웨딩 스냅보다 더 멋진 인생사진을 건졌다. 또한 제주의 숨은 촬영 명소를 알고 계셔서 우리가 셀프로는 찾지 못할 멋진 곳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겹겹이 쌓인 소소한 행복


제주살이를 돌이켜보면 좋았던 순간들은 유독 소소하다. 포장해 온 고등어회를 숙소 식탁에 펼쳐놓고 밤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느껴져 문을 활짝 열어놓았던 그 날이 기억에 남는다. 구수한 80년대 옛 가요를 틀어놓고 김에 고등어회 한 점씩을 싸 먹었다. 숙소에 유아의자가 없어서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유모차를 올려두어 식탁 의자 겸 사용했다. 남편과 내가 고등어회에 빠져 있을 때 옆에 앉은 아기는 최애 반찬 '김'을 계속 가져다가 먹었다.


대단하지도 않을, 어쩌면 너무 허접하기까지 한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영상으로 담아두었다. 그 영상을 종종 꺼내보면 왠지 모르게 슬픈 기분도 든다. 불과 몇 개월 전인데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두 번째 숙소에서 조식을 먹기 위해 각종 빵과 과일을 잔뜩 담아서 방으로 가지고 오자 입 짧던 우리 아기가 환호하며 먹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식사를 마친 후 베란다에 서서 창 밖을 바라보며 아침의 찬 공기를 마주한 그 순간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산 중턱에 있는 숙소라서 온갖 새소리가 다 들렸는데 아기가 짹짹이가 왔다며 반가워하던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앞으로의 육아를 견뎌 낼 힘



남편의 2주 간 휴가로 인해 신생아 때 이후로 처음으로 긴 시간 공동육아를 했다. 남편과 함께 하니 육아가 훨씬 쉬워고, 집을 벗어나니 집안일도 줄어들어 여유가 많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남편은 회사로, 나는 다시 온종일 육아에 전념해야 하는 하루가 갑갑할 것만 같았다. 예상과는 달리 육아는 오히려 더 수월해졌다.


아기는 한 뼘 더 자라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아기를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힘들지 않았다. '아기가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컸네!' 놀라운 마음으로 관찰하게 되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같이 놀자고 생각하니 편해졌다. 마음이 한층 너그러워졌다. 제주에서 내 마음의 자양분이 될 녀석들을 많이 채워온 것 같았다.






작년의 제주살이가 무척 행복했어서 올해도 제주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또 얼마나 많이 성장하고 채우고 돌아오게 될까. 혹은 아무런 이득이 없더라도 괜찮다. 제일 좋은 건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손에 꼽힐 만큼 행복했던 추억 하나를 또 남겨두는 거니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기와 함께 한 제주 보름 살이 - 준비 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