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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Aug 10. 2021

싱가포르와 호치민의만남

싱가포르

다녀왔던 여행지를 떠올리면 그와 함께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집트는 S, 발리는 크리스, 그리고 싱가포르는 T.  


T를 처음 만난 건 호치민의 한 루프탑 바였다. 

싱글인 남자 사람 친구 2명과 오늘 서로의 짝을 찾아주자는 다짐을 하고 갔더랬다. 하지만 다짐이 무색하게 그날따라 너무 신이 났던 나는 몸이 부서져라 춤만 추어댔다. 밤이 무르익어 갈 무렵, 맨 몸에 청 조끼를 걸치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백인 아저씨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참 백인들은 취향이 독특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 아저씨도 취했는지 만취댄스를 추며 우리가 한국 사람인지 물어봤다. 맞다고 했더니 자기 친구도 한국 사람이라며 갑자기 어딘가에서 한국 사람인 듯 아닌듯한 사람을 한 명 데려오더니 인사를 시켰다. T와의 첫 만남이었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미 교포 T는 싱가포르에 살며 친구 총각파티를 위해 호치민에 왔다고 한다. 키가 크고 다부진 몸매. 어딘가 교포스러운 베이지색 면바지에 연노랑 폴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카우보이 아저씨는 T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했는데 난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술에 조금 취해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카우보이 아저씨랑 놀다가 가끔 T랑 얘기를 하곤 했다.


T와 인스타그램과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내 피드를 보더니 사진 찍기, 여행하기, 스쿠버 다이빙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나는 물에서 하는 건 다 좋아하고 여행 다니며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T는 자신의 피드를 보여주며 위의 3가지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거라며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술에 취해서였을까. 사실 여행, 사진, 스쿠버 다이빙은 흔한 취미인데 이 3가지를 좋아하는 T를 우연히 만난 게 운명같이 느껴졌다. 


친구들이 집에 가자고 해서 나도 갈 준비를 하니 T가 나를 붙잡으며 같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다고 했다. 고민을 하다가 나도 T가 더 궁금해져서 그의 무리와 함께 두 번째 클럽으로 이동했다. 클럽에 도착하자 T는 카드를 주며 원하는 걸 시키고 본인의 카드로 결제를 하라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고 목도 말라 생수를 주문했다. 이때부터 T는 나의 정수기가 되어 틈만 나면 주머니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 분명 나랑 계속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물을 계속 사 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물을 계속 마시니 술이 점점 깨고 어느덧 클럽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T는 집에 가기 전에 산책을 잠깐 하자고 했다. 나도 다 큰 성인이기 때문에 바-클럽 다음에 이어질 단계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산책'을 했다. 1군 거리 이곳저곳을 걸으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제일 좋아하는 책, 대학 생활, 가족, 베트남에는 왜 왔는지 등 T는 짧은 시간 동안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는 듯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새벽 5시가 되고 부지런한 베트남 사람들은 벌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T는 구글 지도를 확인한 뒤 우리가 있던 위치에서 본인이 묵는 호텔까지 관광객들 등쳐먹으려는 택시 기사보다 더 돌아가는 길을 택하며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T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가 묵고 있던 호텔 앞에 도착했다. T는 우리 집까지 가는 그랩을 불러주었고 갈비뼈가 부러질 듯이 포옹을 한 후에 우리는 헤어졌다. 


클럽에서 만나 물만 사주고 밤새 얘기를 나누는 남자를 살면서 몇 명이나 만나볼 수 있을까? 정말 착한 사람일 수도 상상 이상의 고단수일 수도 있다. T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니 찾아가서 알아내는 수밖에. T와의 첫 만남 이후 일주일 뒤 싱가포르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Photo by Markus Winkl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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