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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리 May 27. 2020

어느덧, 그렇게 되어버렸다

미스 제주댁 이야기 | #제주살이 #제주한달살기 #제주생활



제주에 살고 있는 요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들이 나의 하루를 가득 채운다. 시야에 막히는 것 없이 저 멀리까지 탁 트인 시원하고 고즈넉한 제주의 풍경, 맑고 넓은 하늘과 바다,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볼 수 있는 푸릇한 들판, 청명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의 오늘을 빈틈없이 꽉 채워주는 것들이다. 그런 날들이 하루가 되고 이틀을 지나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저녁 11시를 넘기지 못한 채 기절한 듯 순식간에 잠들고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는 바람직한 일상. 간혹 두통을 넘어 어디선가 들려오던 삐-소리와는 자연스럽게 이별했다.





육지에 살았던 지난달,


걱정과 불안은 늘 함께였고 그로 인한 우울함은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 자꾸만 나타났다. 자존감도 끝없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결되지 않았던 지난 회사와의 임금체불 문제와 실업이나 다를 바 없었던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 끝없는 취업 준비와 확신 없는 구직활동의 스트레스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섬으로 오기 직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우는 밤은 일상이었고 좌절의 눈물도 익숙했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게 하는 지긋지긋한 두통은 매일 나를 따라왔다. 영양제보다 타이레놀을 더 열심히 챙겨 먹은 날들이었다.





올레길을 걷는 요즘,


작은 것 하나에 크게 감동하고 행복할 일이 넘쳐난다. 처음과 중간, 끝 지점에서의 스탬프가 올레 패스포트 각 코스 페이지에 서로 부딪힘이 없이 선명하게 각자의 자리에 찍히는 것만으로도 환호를 지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동네길을 걷다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를 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신이 난다. 파란색의 정방향 올레길 표식과 붉은색의 역방향 표식을 잘 찾아 길을 헤매는 일이 없이 목적지까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것이 즐겁고, 저 멀리에 있는 제주올레 리본이나 스탬프 간세를 내가 먼저 발견하면 엄청난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렇게 뿌듯하고 기쁠 수가 없다.






꿈 많은 20대, 늘 당차고 모험을 즐기던 나. 정신을 차려보니 꿈을 꾸는 것이 사치인 듯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잔뜩 겁을 먹은 30대의 내가 되어있었다. 어차피 나는 안될 거니까. 도전해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한 발자국 뒤에서 서성였다. 글을 쓰는 일은 나의 것이 아니라며 스스로 내려놓아버렸고 꿈이 아니더라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자포자기의 심정이던 내게 제주는 여유라는 선물을 주고 나 자신을 돌보게 하더니,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내 안에서 찾을 수 있게 했다. 내 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열정이라는 작은 불씨에 스스로 불을 지펴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불행하다 여겨지는 일상과 거리를 두고, 나를 압박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피해 멀리 떨어져 변화된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답이었을까. 정확히 무엇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그간 나를 옥죄던 걱정과 불안 따위의 마음들로 척박해져버린 땅에 묻혀있던 희망의 씨앗이 설렘을 가득 품고 피어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도 좋을 일인가.


가끔 섬에서의 생활을 너무 좋아하고 만족하는 나 자신이 어이없어 되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올레길이 좋고, 제주가 너무 좋은 걸.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제주에 올 때마다 올레길 걸을 생각을 왜 못 했을까. 이렇게 좋은 제주살이를 왜 마음으로만 품고 늘 바라기만 했을까. 왜 이제야 왔을까. 더 일찍 마음속 버킷리스트를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고 보내버리는 하루하루가 아쉽기만 하다. 눈 깜빡할 새에 섬에서의 한 달 살이도 벌써 3주 차에 접어들었고 한 달이라는 시간 중 십 일이 채 남지 않았다. 어느덧, 그렇게 되어버렸다. 아쉬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매일같이 '제주에 살면'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제주의 바다, 풀, 하늘을 꾹꾹 차례로 눈에 담아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진심의 말을 툭 던져본다.



정말 나 제주에 살면, 어떨까?     





<한 달이라도 좋아요 미스 제주댁> 은 브런치에서 글·사진으로, 유튜브에서영상으로 제작됩니다. 영상이 궁금하시다면 놀러오세요 :-> https://youtu.be/i7iXoxWKBx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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