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이리 Jul 06. 2020

유독 멜랑꼴리한, 그런 날

#임금체불 #해결 #합의


* Melancholy : 이렇다 할 이유 없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하고 뭔가 애매한 기분이나 느낌



취업 준비, 연이은 서류 탈락, 취준생을 더 말려 죽이는 코로나 19 등 여러 이유로 마음이 유독 멜랑꼴리한 날이었다. 조금이라도 바깥공기를 쐬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때마침 쟁여둔 비상식량도 떨어졌으니 마트에 다녀와야겠다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단단히 장착하고선 밖을 나섰다. 해가 저물어갈 즈음 터덜터덜 걸어간 마트. 이것저것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집까지 15분이나 걸어가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카트에 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카트가 허한 마음을 대신하듯, 무엇으로든 빈 공간을 채워보려 애쓴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정처 없는 장보기를 하고 있는 중에,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으로 요동쳤다. 드르륵드르륵.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평소 같으면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는 바로 무시해버리는 편인데, 쉬이 거절을 누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지원한 회사에서 전화를 한 거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진동이 5번 울릴 때까지 가만히 쳐다만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져버리지 못해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인사에 "안녕하세요. 이나윤 씨 맞으신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한 마디는 취준생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상상만으로도 떨려서 마구 나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 말했다. "네! 맞습니다!" 내가 바로 당신이 찾는 그 사람임을 빨리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돌아온 말이 영유아 아가들도 모두 따를 법한 경쾌한 솔 톤의 목소리를 그 어떤 롤러코스터보다 빠르게 정반대의 지하세계로 떨어뜨렸다.

"저... 모르쇠 씨 부인되는 사람인데요."
전화 속 목소리는 다름 아닌, 임금체불로 소송 중인 옛 회사 대표의 아내였다. 1년 2개월 만에 온 첫 연락. 아직 받지 못한 밀린 월급을 갚아줄 테니 합의서를 작성해달라는 것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아 대면하는 자리를 피하려는 내게, 검찰에 기소되어있는 사건이라 피해자 본인의 합의서 원본을 제출해야 하므로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다는 그녀. 빨리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합의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 아닌 협박의 말들이 이어졌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아주’ 짧은 전화 이후,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두통에 이명까지 더해졌고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답답해져 버렸다. 의미 없는 물건들을 양 손에 가득 들고 돌아가는 길. “아휴, 너무 무겁다” 괜스레 혼잣말을 되 내이며 몇 번이고 어두운 구석에 멈춰 섰다. 꾹꾹 눌러온 하루의 힘든 마음이 폭발한 듯 터져 나오는 눈물을 훔치기 위해.

첫 번째 전화 이후, 몇 번의 문자를 통해 각자의 조건을 주고받으며 합의점을 찾았고 다음 날, 그녀는 나에게 왔다. 서로를 대면한 자리에서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은 뒤, 나는 합의서에 사인을 했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합의금을 송금했다. 처음 연락을 받은 시점부터 만나기까지 반나절의 시간,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첫인사를 나눈 순간부터 '안녕히 가세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까지는 고작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임금체불 소송 기간이 길어지면서 늘 고대했던 마지막 순간. 밀린 월급을 모두 받고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끝나는 상상을 했을 때는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쁘고 홀가분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순간에 놓인 나는, 그리 개운치만은 않았다. 물론, 기쁘기도 했고 큰 짐 하나를 덜어낸 것 같은 홀가분함도 있었지만, 찝찝하고 허무한 감정이 그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분 나쁜 이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허무함은 1년 하고도 2개월가량의 시간 동안 나를 힘들게 하고 더 이상 나에게 꿈은 없다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게끔 만든 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고통받은 시간, 상처 받은 마음에 비해 상대측의 사과도 보상도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찝찝한 기분은? 합의를 위해 5분가량 대면했던 그녀 때문이었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누구든 대표 측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연락을 하면서도 자꾸만 화가 났고 그간의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배신감과 증오의 대상이던 이를 대신해 나온 그녀에게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년 2개월의 임금체불이 끝났던 그 날,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만나기로 했던 카페에 도착했다. 행여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넘치는 화를 참지 못해 그녀 앞에서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 따위는 없어야 했기에. 마음을 진정시킬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뭐라고 말을 시작해야 할까. 왜 그랬냐고 따져야 할까. 수 백 가지 고민들이 있었지만, 한 시간 동안 그 어떤 답도 내리지 못했다. 드르륵드르륵. 내 핸드폰이 울림과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며 주위를 살피는 한 여자가 보였다. 나의 분노가 만들어 낸 상상 속 그녀의 얼굴은 짙은 화장에 다부진 몸,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수수한 옷차림의 아담한 체형, 새하얀 얼굴은 핼쑥하고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손을 들어 보였고 우리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해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던 그녀가 서둘러 가방에서 합의서가 든 파일을 꺼냈다. 파일 속 여러 장의 종이들. 어떤 서류인지 보지는 못했지만, 나 말고도 많은 피해자들을 만나러 다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합의서를 꺼내고 보여 주며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 오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마구 따져 들고 싶기도 했고 눈동자가 눈꼬리에 영영 자리 잡아버릴 만큼 째려보고도 싶었는데 폭발할 것만 같이 화가 잔뜩 나있던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다. 내 마음의 생채기가 너무 커서 보이지 않았고, 보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 그 날 내가 만난 사람이 합의를 해야 하는 가해자가 아닌, 또 한 명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그녀도 피해자였다. 회사를 경영하고 아무런 이야기 없이 6개월의 임금을 주지 않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나와 다시 일하고 싶다며 동네로 찾아오겠다는 거짓의 말들로 나를 회유하려 했던 사람도 그녀가 아니다.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소속된 회사에 대한 굳은 믿음을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노동력을 착취한 이도 그녀가 아니다. 나에게 연락을 하고 찾아와 얼굴을 마주하며 사과하고 합의해야 하는 것 역시,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전 회사 대표 모르쇠 씨의 잘못을 대신하여 부인이라는 이유로, 세 아이의 엄마이기에 모든 일을 감당하고 있을 뿐.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사건이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피해자들만 이렇게 넘쳐나고 가해자는 끝까지 가해자인 빌어먹을 세상 같으니.

그동안 힘드셨죠. 늦게 드려 죄송하고 합의해주시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멀리서 오시느라 힘드셨죠. 와주셔서 감사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글을 쓰고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