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작가 #브런치북 #우연 #인연
겨울이 느껴질 만큼 추워진 가을의 끝자락, 남자 친구의 생일 선물을 직접 만들기 위해 홍대의 가죽공방으로 향했다. 멀지 않았지만 10년을 살던 동네에서도 길을 헤매는 나 스스로를 잘 알기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길 찾기 어플을 켰다. 지도 속의 파란 점(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시)을 따라 걷다 조용하고도 낯선 거리에 다 달았다. 전에 와본 적이 없어 익숙하지 않은 동네라 집에서 서둘러 나왔더니 수업을 예약해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버렸다. 평소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거리를 좋아해서 낯선 이 동네가 꽤 마음에 들었고, 이왕 이리된 거 천천히 골목을 산책해보자 싶었다. 예스러움이 많이 묻어나는 동네 같아 정겹다고 생각하던 찰나, 약간은 생뚱맞은 세련되고 깔끔한 외관의 카페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카페라는 것을 인지하고나니 갑자기 따뜻하고 쓴 아메리카노 생각에 목이 말라 이른 시간 우연히, 그곳으로 들어갔다.
제법 쌀쌀했던 바깥공기에 차가워진 몸을 녹여 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거리를 볼 수 있는 창가에 앉았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글을 써야겠다 싶어 투박하게 큼지막한 노트북을 꺼냈지만, 하려던 글 작업이 아닌 멍 타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브런치라는 글을 쓰는 이들을 위한 커뮤니티에 종종 글을 적고 있다. 내게는 이곳이 온라인 작업실이자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어볼 수 있는 서점과도 같은 공간이다. 브런치에서는 좋은 글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작가님들이 출판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몇몇 출판사들과 함께 꽤 큰 규모의 글 공모전을 때때로 개최하고 있다. 나 역시 때마다 도전했지만, 탈락의 쓴 맛을 본 경험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도전하는 작가님들의 수에 비해 당선의 기회는 매우 한정적이라 응모하면서도 큰 기대는 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나에게 여지를 남겨 발표날이 다가오면 괜히 심장이 두근거린다. 우연히 들어선 그 카페에서도 새롭게 뜬 브런치 8회 공모전 준비를 위해 글을 쓰려던 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짧게든 길 게던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기 시작하고는 하는 일마다 번번이 안 좋은 끝을 맞닥뜨리게 되어 자신감과 자존감이 무척이나 낮아진 상태였다.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고 키보드를 두드리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고 있는 게 맞나? 내가 쓰는 글이 괜찮은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 날 이른 시간의 카페에서도 한 줄을 끄적이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다 이내 다시 막막함에 힘이 빠져버린 탓에 멍 타임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 보다. 무엇을 적어야 하지? 글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라며 또다시 답이 없는 질문과 나를 갉아먹는 답들을 혼자 주고받으며 모니터 속 브런치 공모전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 작가님!”
넋을 놓고 있는 나에게 요즘은 들을 일이 없는 호칭으로 누군가 조심스레 불렀다. 혹시 아는 분인데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서 찰나의 시간 동안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으나, 아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기분 좋은 밝은 인사에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하얀 버킷햇, 감각적인 빈티지 옷차림을 하고 투명하게 보일만큼 하얀 얼굴에 수수한 웃음을 가득 머금은 그녀. 나의 노트북 모니터를 우연히 보았다며 본인도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다고 말을 건네 왔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나를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러준 사람도 그녀가 처음이었고, 브런치를 매개로 인사를 나누어 본 낯선 이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더욱이 지난 공모전에 당선이 되어 대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님이라니. 어머나! 하며 입이 떡 벌어졌다. 브런치 공모전에서 수없이 많은 낙선을 경험하며 도대체 당선되는 작가님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었다. 세상에나. 나도 그녀를, 그녀도 나를 만나게 된 순간의 우연이 반가웠고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했다.
누군가는 ‘그랬었지’ 하고 잊어버릴 에피소드일 수 있지만 내게는 인스타그램 피드에 이 우연한 순간을 기록하여 박제해 둘 만큼, 그분의 SNS에 들어가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남길 만큼 그 날 작가님과의 만남은 나의 뇌리에 매우 진하게 남았다. 억세게 운이 안 좋아 잇달아 절망의 상황들에 부딪히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기에는 틀렸다며 놓을까 말까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내 두 손을 잡아 다시 키보드에 올려놓아준 그녀의 말들이 그 이유였다.
‘요즘 어떤 글을 쓰고 있어요?’
‘어떤 글일지 궁금해요’
‘우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읽어보고 싶네요! 응원해요’
인사를 포함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5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속 주고받은 대화가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오랜 시간 동안 누구라도 해줬으면 하고 기다렸던 말들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일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가족과 주변 지인의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그 길을 응원해주는 사람은 이제 남자 친구 단 한 명만이 남아있다. 대부분 ‘충분히 마음은 알지만 이제 그만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나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나에겐 응원의 말이 절실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우연히 만나 처음 이야기를 나눈 그녀가 사소하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그 말들을 고스란히 해준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던 내가 쓰는 혹은 쓰려는 글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고, 수줍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버무려버린 설명에도 기꺼이 잘 될 것이라 힘을 실어 말해주는 응원이 있었다. 또 떨어질 것 같다고 삐죽이는 내게 조심스럽지만 정성스럽게, 몇 가지 팁도 알려주던 그녀의 다정한 배려는 그 날의 추위를 몽땅 잊어버릴 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의 글을 궁금해하고 응원해준다는 것 그 마음이 다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날의 짧은 만남 이후, 나는 포기하려는 마음을 접고 공모전에 응모할 글들을 하나씩 채워 무사히 공모전을 마칠 수 있었다. 결과가 어떻든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썼다는 것에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간 공모전에 참여하며 늘 같은 마음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공지가 뜨면 마음이 쿵 내려앉았고 한숨이 나왔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싱숭생숭한 마음은 필수였고 조급증은 옵션이었다. 언제나 글에 진심을 담았지만 고치고 고쳐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부족하게만 여겨졌다. 이번에도 진심을 다해 글을 적었지만 여전히 부끄럽고 부족해 보이는 것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감일을 보내는 나의 마음이 조금은 달랐다. 마음이 쿵 떨어진다기보다 신났고 재미있었다. 부족하다 나를 다그치던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 부적같이 느껴졌던 대상 작가님의 따뜻한 응원의 마음 때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 날의 우연은 감사하게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만남을 계기로 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른 시간 우연히 들어섰던 카페에서 느꼈던 따뜻한 마음을 금요일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고 있다. 한 해가 지날수록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일에 점점 더 무감각해져만 가는데, 이상하리만치 금요일만 되면 반가운 우연을 특별한 인연으로 만들어가는 일이 자꾸만 하고 싶어 진다. 찰나의 그녀처럼 나 또한 나의 문우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한 말과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