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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May 17. 2023

[도쿄텐텐 1] 도쿄는 흐림  

어디서부터 이토록 '별로'인 인간이 되었는가,를 고민하는 나날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이어질수록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가 없는 깊은 어딘가에 더욱 단단히 묶이고 마는 기분. 언제부터 '별로'였는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이내 안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다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로 회귀하고 만다. '별로'인 인간이 되어가고, 되었고, 되어버린 이후, 스스로 그러한 지도 알아채지 못하는 나를 그저 방치하고 있다.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나 비행기를 타기 직전이다.

방치된 나를 돌보러, 아니 내가 나를 돌볼 마음이 들게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시도한 잠시의 일탈.

똑같은 나를 버리고 싶어 똑같지 않은 곳으로 간다.

오랜만의 도쿄.

혼자 타는 비행기.

분명 이전에 살아본 적이 있는 도시, 해 본 적이 있는 일인데 겁이 난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입천장이 찌릿거린다. 좋은데 서글프고 설레는데 두렵다.   

수년만이지만 눈에 익은 김포공항의 풍경. 익숙해서 슬픈.

스물여덟, 유학을 떠나던 날, 돌아오던 날, 그때의 부모님, 반짝이던 나, 기대했던 미래.

지금의 내가 꽤 괜찮은 서른아홉이라면 그 모습들을 호기롭게 추억할 수 있으려나. 지금이 '별로'이지 않았더라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결말을 스포일러 당한 후 다시 보는 첫 장면 같은 기분. 아는 풍경이라 아는 씁쓸함. 지난날의 나를 떠오르게 하는 장소에 서서 지난날의 나를 아름답게 돌아보며 그때의 내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지,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는 아직 머물러 있다. 시간이 지나도 시작하지 못한 채로.

웰컴 도쿄, 웰컴 스이카

도쿄는 흐림.

세관을 통과할 때 사진 찍히는 타이밍을 알지 못해 엉망으로 찍힌 사진이 영 맘에 걸렸지만 (만약 여행 중 사고가 발생한다면 저 사진이 뉴스에 나오는 걸까? 상상해 보면 너무 수치스러운데... 그런 상상은 왜 하는 걸까? 같은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이런 얼굴로 찍혔다. 두 눈은 감고 입은 삐뚤어진 채로


어찌 되었던 출발 전의 걱정과는 달리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몸에 익은 움직임으로 조금의 헤맴도 망설임도 없이 도착한 숙소.

'칸다'라는 동네. 도쿄의 도심부는 처음이다.

그간 그렇게 도쿄를 오가고, 심지어 살기까지 했었지만, 늘 익숙한 도쿄 서부에만 머물렀었다.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와본 것은 처음인 칸다라는 동네의 첫인상은 이 동네에 가득한 직장인을 닮았달까.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역 주변의 유흥가를 지나자 나타나는 고층 건물들.

진보적 내일과 희망 없는 오늘이 뒤섞인 듯한 직장인의 거리.


오코노미야끼를 처음 만들어 볼 기회를 얻게 된 어느 술집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일본에서 유학 중인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꽤 오랜 기간 짝이었지만 아주 친했다고 말하긴 어려운 우리.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서 연결고리가 되는 친구를 중간에 둔 덕에, 고등학교 졸업 후에 더 친해진 고등학교 동창.

그러고 보니 우리 사이의 교두보 친구를 제외하고 둘이 이렇게 만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색하진 않은, 서로를 잘 모르지만 또 서로의 지난날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꽤나 기억하고 있는 신기한 사이.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래 봤자 대개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들. 이미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는 것인데도 그게 또 즐겁다.

양복 차림의 일본 직장인들 사이에서 어쩐지 이질적인 옷차림을 한 둘이 앉아 이질적인 언어로  

고등학교 시절엔 그랬었지, 그래서 걔는 어떻게 지낸 대로 이어지는 추억담 무용담 그리고 뒷담화를 하며 깔깔대는 시간.


나는 지금 도쿄에 있다.

나는 지금 도쿄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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