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라잡이
서문: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무기력함을 자주 느끼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좋은 길라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본문:
직장생활을 3년 정도 했을 때 하루는 출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아, 고작 이거야?’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열심히 공부해서 직장으로. 24년을 바쳤던 인생의 결과값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나름 괜찮은 회사와 좋은 동료들이 있었지만 반복적인 업무와 쳇바퀴 같은 삶에서 처음으로 회의감을 느꼈다. 이 업무를 아주 잘해서 10년 뒤에 운 좋으면 건너편에 앉은 팀장님의 자리에 앉고 20년 뒤에 플로어 건너편의 헤드 자리에 앉으면 뭐가 달라질까. 뻔하게 예측되는 미래는 오히려 나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관심을 갖게된게 철학이었다.
이 글은 카뮈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와 다른 몇 명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대해 알아볼 것이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카뮈의 철학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카뮈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주제는 “부조리”이다.
#1. 인생은 고통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식하다
카뮈에 따르면 인생은 “세상”과 그 세상을 인식하는 “나”, 그리고 “세상과 나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부조리함은 즉 세상과 나의 관계가 합리적이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가 합리적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인생은 고통스러운데 세상은 고통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서 고통은 필연적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다. 가난한자는 필사적으로 생존하기위해 고된 일과 온갖 모멸을 감내하면서 고통받는다. 부자는 부자대로 인생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며 권태에 고통받는다.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원치 않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을 경험하며 고통받는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죽하면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 (苦海)라고 했을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고통의 바닷속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인데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라도 알아야할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에게 전혀 무관심하다. 때가 되면 바람이 불고 천둥이 내리듯 세상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세상은 인간이 창조된 이유, 삶의 목적 등에 대해 알려주지 않기에 인간은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힘든 삶을 살아간다. 카뮈는 인간의 욕망과 궁금증에대해 답해주지 않는 세상과 인간의 관계를 부조리하다고 말한다.
#2.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자살, 희망, 반항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적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함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면 되지만 인생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자살, 희망 혹은 반항.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부조리함 속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세 가지 선택지를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자살은 말 그대로 육체적 자살을 의미하며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상과 나 사이의 불합리한 관계를 끝내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다. 도덕적 관점에서 자살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자살은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선택에는 오점이 있는데 이는 조금뒤에 살펴보도록 하겠다.
두 번째로 희망. 이는 종교 등 어떤 사상을 믿음으로써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희망은 현재 “나”에게 주어진 세상을 변형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부조리함과 타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무신론자인 카뮈는 이러한 행위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말하는데 철학적 관점에서 종교는 부조리함에는 이유가 있음을 덧붙이는 기만행위일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입각한다면 자살과 희망은 둘 다 합리적인 선택지라고 볼 수 있다. 카뮈의 철학과는 무관하게 만약 종교를 믿음으로써 더 나은 삶을 살거나 자살을 함으로써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행복의 총량은 늘고 고통의 총량은 줄었기에 이러한 의사결정들은 분명 더 많은 공리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두 선택지는 그저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면, 철학은 부조리함을 소거하는 것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부조리함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카뮈에 따르면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부조리함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반항하는 것이다.
#3. 반항하는 인간
시지프는 신들의 미움을 받아서 영원히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가 겨우 바위를 정상까지 밀면 바위는 다시 반대쪽으로 넘어가서 그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고 오직 고통뿐이다.
카뮈는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반항하라고 말한다. 어차피 인생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맞서 싸우라는 뜻인데, 역설적이게도 인생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약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그저 각자가 태어난 이유와 의미대로 기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인생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일을 하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죽거나 다른 세상을 믿는 대신에 주어진 고통을 견디고 살아간다. 니체는 이런 사람들을 Übermensch, 즉 초인이라고 말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주로 무언가를 탐구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증진시키는데 노력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고 더 발전하는데 성취감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잘것없어도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반항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에, 부조리한 관계를 이겨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운명에 반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나는 이미 긍정적으로 살고 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하지만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긍정적으로 사는 것과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능동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관성대로 사는 사람과 극복하고 사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결문: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말했다. 목표를 가진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목적을 이룬 사람은 다시 허무함을 느낀다. 욕망을 쫓는 사람이나 권태를 느끼는 사람이나 고통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이다. 원래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니 권태로움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만약 당신이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자주 무기력함을 느낀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세상의 본질인 부조리함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고통을 끝내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 세상에 의미를 투영하여 무언가를 믿는 것, 아니면 주어진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 각 선택지에는 저마다의 합리적인 부분들이 있지만 부조리함을 직시하는 선택은 오직 하나뿐이다. 부조리함에 맞서 싸우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다. 주어진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고, 힘들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긍정을 되찾고 웃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반항함으로써 당신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맞서 싸우는 전사다. 실패를 이겨내고 장애를 극복하자. 슬픔을 견뎌내고 아픔에서 웃자. 그렇게 싸우다 보면 자신의 힘이 고양되고 예전보다 강인해진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강해지면서 주어진 운명에 반항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적극적인 선택이다.
-끝